동서독 분단 시기, 서독은 늘 동독 주둔 50만 소련군 기갑부대가 동독 국경으로부터 라인강까지 최단거리인 ‘풀다 갭’(Fulda Lucke)을 통해 경제중심지 프랑크푸르트까지 침공해 들어와 서독을 양단(兩斷)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서독은 군사안보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서독 외교는 서독이 정치와 군사안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에 따라, 서독 외교는 보수·진보 관계없이 늘 ‘신중함’과 ‘일관성’을 기초로 미국, 영국, 프랑스는 물론 소련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한국은 베트남, 대만과 함께 동아시아의 ‘풀다 갭’으로 불릴 정도로 군사안보적으로 취약하다. 북한은 원자·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확보, 이른바 ‘양탄일성’(兩彈一星)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북한은 7차 핵실험을 통해 소형 전술핵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북한 핵무기가 강철검이라면, 한국의 최첨단 재래식 미사일은 마제석검밖에 안 된다. 석검으로는 강철검과 맞서 싸울 수 없다.

공산권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남한은 북한에게 현금자동지급기였다가 최근 남벌(南伐), 즉 적화통일 대상으로 바뀌었으며, 냉전 종식 이후 30여 년간 제로였던 남벌 시도 가능성은 (북한이) 전략·전술핵으로 무장한 지금 10% 정도로 높아졌다. 한국은 북한의 남벌 의지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거나 한국을 지킬 의지가 미약한 대통령이 등장할 경우, 북한은 이를 기회로 보고 도발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한국은 한·미 군사동맹이 한국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북한이 워싱턴을 핵무기 장착 ICBM으로 위협할 유사시에도 미국 지도부가 미국 국민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한국을 방어해줄지는 알 수 없다.
이전 정부는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등 양탄일성을 완성해 가는 북한에 대한 환상에 빠져 우리의 방어태세를 약화시켰다. 새 정부는 핵무장한 북한이 한국을 ‘풀다 갭’으로 만들 수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취약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다. 현실의 토대 위에서 신중함과 일관성을 기초로 북한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풀다 갭’인 동시에 미텔 오이로파(Mittel Europa·유럽의 중심) 독일에 비견되는 미텔 아지엔(Mittel Asien·아시아의 중심)이다. 미텔 오이로파 독일은 19세기 이후 외교, 전쟁 가릴 것 없이 늘 영국과 프랑스 문제를 먼저 해결(서방정책, Westpolitik)하고 난 다음 러시아(소련)에 대응(동방정책, Ostpolitik)해왔다. 제2제국 시대 비스마르크, 제3제국 시대 히틀러, 서독 시기 브란트와 콜도 마찬가지였다. 미텔 아지엔 한국이 살아남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독처럼 신중함과 일관성을 기초로 미·일은 물론 중국도 잘 다루고, 중국 포함 모든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중국 역시 앞마당에 위치한 한반도의 안정을 해치고, 나아가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를 핵전쟁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북한의 도발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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