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호의미술여행] 미술의 세밀 묘사와 금속활자 인쇄술

서양미술사 최고 전성기는 르네상스였다.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조화·균형이라는 미의 전통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점에서다. 그런데 사실적 묘사와 조화·균형을 이루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유럽 각 지역 미술작품이 서로 다른 특색을 보였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원근법에 의한 그림 전체 구도를 강조하고, 좌우 대칭 같은 방법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 했다.

이에 비해 북유럽 미술은 그림의 세부적 구성요소들에 초점을 두고, 그것들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북유럽이 공업이 발달한 곳이라는 지역적 특성에 의한 것인데, 부분품들의 정밀한 결합이라는 기계적 특징이 반영된 결과였다. 조화와 균형은 빛의 효과인 명암 대비를 통해 이뤘다.

뒤러 동판화 ‘아담과 이브’. 보스턴미술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 화가는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그의 작품에서 세밀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동판화이다. 동판화는 날카로운 철필로 동판 위에 그림을 그려 부식시킨 후 파인 홈에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이기에 나무를 깎아내는 목판화보다 세밀한 묘사에 더 적합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만난 아담과 이브를 표현한 그의 동판화이다. 쥐, 황소, 토끼, 앵무새 등이 서로 같이 어울리고, 동물들이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다. 뒤러가 에덴동산을 지상 낙원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나무 사이로 뱀이 나오면서 이브에게 운명의 과일을 주려 하자 아담이 손을 내밀어 막고 있다.

나무껍질, 나뭇잎, 몸의 근육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준다. 뒤러가 명암 대비를 적절히 활용해서 화면의 균형감도 살렸다. 숲의 어두운 배경과 나무의 밝은 부분을 대비시키고, 인체의 양감을 나타낸 명암 대비도 덧붙였다. 북유럽의 세밀 묘사 전통과 접목시킨 뒤러의 독특한 방법이다.

독일의 세밀 묘사 전통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으로 이어졌다. 이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인쇄본보다 78년이나 앞선 우리의 직지심체요절 실물이 프랑스 현지에서 공개 전시됐다. 자랑스럽긴 한데 남의 나라에 있고 남의 나라에서 전시된다는 게 참 아쉽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