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 세계뉴스룸

입력 : 2023-09-14 06:00:00 수정 : 2023-10-03 22:42:2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

“영아 유기하니까 여자가 더 잔인하다고요? 아니 엄마랑 아기 두 사람을 버리는 그 인간은 뭔데 그러면? 애초에 그 둘을 책임지지 않은 잘못이 제일 큰 거 아니에요? 근본 원인은 거기에 있잖아. 근데 왜 여자들만 유기했냐는 둥 혼자 잘못한 것처럼 말해요? 같이 벌 받아야지. 책임지지도 못할 짓을 한 남자한테 더 책임 물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성범죄야. 지 볼일 밖에 더 봤어? 임신은 감당 안 된다면 조심했어야지, 책임 안 질 거면.”

 

여진(가명·58)이 참아왔던 말을 쏟아냈다. 혼자 키운 딸이 올해 스무살이 됐다는 그는 ‘22년차 미혼모’다. 58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아이 아빠에게 양육비 한 번 받지 않고 버틴 세월은 여진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빠져버린 양쪽 어금니, 흔들거리는 남은 치아들, 다 내려앉은 잇몸, 목과 허리의 디스크 등등.

 

그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어떤 일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줄 수 있는 산증인이다. 

 

◆내가 흔들리면 아이도 흔들린다

 

시간을 2002년 12월로 돌려본다. 막 아이를 출산한 여진이 전전긍긍한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남자는 돈 벌 생각은커녕 알콜 중독자 같은 상태로 행패나 부린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 먹으러 다니는 통에 혼인 신고는 꿈도 못 꿨고, 아이를 호적에 올리는 것도 할 수가 없다. 남자는 1년 동안 “(신고하러) 내일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아이는 약 1년간 출생미등록 상태로 있었다. 나중에 이혼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혼인 신고는 포기했다. 여진은 출생신고도 못 한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의무 접종 주사를 맞혔다. 그러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무턱대고 애를 들쳐메고 집을 나왔다. 벌금을 내고 몇 개월에 걸쳐 법적 절차를 밟아 아이를 자신의 성으로 호적에 올렸다.

 

처음엔 갈 곳이 없어 아는 언니들이 하는 식당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를 해줬다. 며칠간 일하러 갈 데가 생기면 옆집에 아이를 맡기고 다녀오곤 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복지는 정말 죽지만 말라는, 입에 풀칠하면 끝인 수준이었다. 쌀 사고 공과금 내고 월세 내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을 해야 겨우 생활이 가능했다. 몸이 눈에 띄게 망가졌다.

 

“아비한테도 버림 받았는데 엄마까지 그러는 건 진짜 아니지. 그래서 그냥 죽기살기로 여태까지 키운 거죠. 독하니까 했지. 하, 근데 독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내가 흔들리면 아이도 흔들리니까.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좀 강한 구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모든 여자가 그렇진 않잖아요. 그런데다가 정책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너무 부족하니까 여자들이 앞날이 안 보이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잖아, 스스로. 그러니까 자꾸만 그런 사태(영아 유기나 살해)들이 나오는 거 같아요.”

 

자신을 강하고 독한 여자라 한 여진이지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서는 펑펑 울었다. 엄마가 아이를 혼자 케어할 수 없어서 고아원에 보내는 장면이 특히 가슴에 박혔다. 그는 그 마음을 100번 이해한다고 했다.

 

“저도 처음에 그랬어요. 야, 이거 어떻게 살아야 되나. 이 젖먹이를 데리고 진짜 암울해요. 너무 힘드니까 우리 딸 고아원에 갖다 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엄마 혼자도 아이 배곯리지 않고 힘겹지 않게 키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은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나부터도.”

 

◆“혼 낼 거면 같이 혼내야지”

 

20년간 산전수전 다 겪은 여진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공평한 책임’, 이를 반영한 현실감 있는 제도 개선이다. “제일 시급한 건 양육비, 영아 유기에서 남자도 같이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라는 그는 이런 근본적인 변화 없이 “책상에 앉아 말도 안 되는 법 가지고 이상한 소리들 안 했으면 좋겠다”고 토해냈다.

 

“누가 더 책임감이 없었는지는 둘 다 불러서 조사해서 가리면 되잖아요. 그걸 확인해서 더 책임이 무거운 쪽에 더 세게 벌을 줘야지. 지금은 아예 한쪽은 찾으려고도 안 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내버려두잖아요.”

 

이어지는 여진의 말은 예리하다.

 

“여자 혼자만의 책임으로 전가할 거면 복지를 그만큼 잘해놓든지. 남자한테 ‘너 없어도 얼마든지 키워’ 할 수 있게. 근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니잖아요. 자식 뒷바라지 할 수 있는 정책이 되면 최소한 버리지는 않을 거 아니야. 엄마들 심신이 덜 피폐해지면 아이한테 더 사랑을 많이 줄 것이고.”

 

비슷한 지적을 민지도 했다.

 

“범죄의 원인을 없앨 만한 뭔가를 착착 만들어 놓은 다음에 ‘이런 것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넌 영아유기를 했어’가 돼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유기한 너의 잘못이야’라고 하면. 그 전에 뭐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가며 어떤 지원도 못 받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건데 이게 살인이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은진은 ‘아이 아빠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취재진에게 연락해 온 인물이다. 그는 영아유기 사건의 대중 반응을 보며 댓글 등에서 항상 여자만 욕을 먹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왜 처벌 대상이 여자만 되는지 저는 의문이거든요. (영아유기 가해자들은) 저보다 더 약자인, 훨씬 더 어리고 직업도 없는 여성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들에게만 죄를 묻고 남자는 몰랐다거나 그냥 연락 두절되면 끝나는 거잖아요. 남자는 죄가 없다고 보는 게 진짜 맞는 건가요?”

 

현실적으로 자력이 없는 남자에게 받아낼 양육비도 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면 나라에서라도 뭘 해 줘야지 백날 출생미등록 아동 전수조사하고 엄마들 처벌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여진은 되묻는다. 여자든 남자든 아이 키우는 사람이 잘 키울 수 있게끔 하는 제도, 키우지 않는 사람이 책임지지 않을 때는 더 강력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수조사? 눈 가리고 아웅이잖아요. 조사하면, 처벌하면 뭐 할 건데. 그런다고 뭐 별다른 수가 있어요? 자식 버렸다고 처벌하면 그 사람들이 크게 반성할 거 같아요?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럼 같이 죽을까요?’ 이렇게 되지.”

 

국회는 지난 7월 중순 일반 살인죄나 유기죄보다 형이 낮은 영아살해·영아유기죄를 70년 만에 폐지하는 형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분만 직후인 여성의 특수한 상황과 산후우울증 등을 참작하는 현행 영아살해죄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이유다.

 

이를 두고 은진은 “보여주기식이라고 생각해서 화가 난다”고 했다. 영아살해를 일반살인죄로 처벌하는 것 자체는 동의하지만, 눈에 보이는 법안만 바꾸고 여성들이 양육하는 환경에 대한 제도 변화는 없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애 낳고 하는 경우는 정말 극단적인 사례인데, 그런 상황에서 여성이 어떻게 이를 헤쳐나가야 할지보다 처벌 수위만 높이는 건 “실질적 개선이 아닌 허울만 신경쓰는 것”이란 지적이다.

 

가중 처벌을 할 작정이라면 “남자도 찾아내서 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민지는 말했다. 영아유기는 분명 엄마 잘못이지만 아이 아빠에게 책임이 아예 없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봐서다.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조성된 거고 궁지에 몰려서 그런 선택을 한 건데 원인의 가장 처음에 있다고 해서 제외돼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특히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지지를 보내거나 그런 게 없었을 때 책임이 있다고 봐요.”

 

여진은 “22년간 겪어보니 법이 약한 게 제일 문제”라고 말한다. ‘양육비 안 주고 무책임한 놈들 세게 처벌하지 않는’ 법 말이다. 영아살해죄는 초고속으로 폐지되는 수순인 데 비해 비양육 부모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은 좀처럼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이렇게 자꾸 얘기가 나올거면 1차적으로 양육비 부분의 법이 많이 세져야 할 것이고, 엄마들이 권리를 주장할 때 법적 절차를 좀 간소화한다든지 어떤 기관이 같이 해주는 곳이 생겨야 한다”고 여진은 강조했다.

 

◆낳으라 한 적 없으니 책임도 없다는 남자

 

본지가 한국미혼모가족협회, CJ나눔재단 등과 협력해 69명의 미혼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에서 ‘한국에서 미혼 여성의 임신·출산·양육 과정에 생부가 책임지는 정도’는 평균 1.33점(5점 만점)으로 나왔다. 생부가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며 1점을 준 답변이 47명으로 68.1%를 차지했다. 3점 이상 준 경우는 단 1명에 그쳤다.

 

취재진이 만난 미혼모들은 ‘책임지지 않는 남성’이 남긴 다양한 어록과 행태를 증언해줬다. 

 

아이를 지우라고 했는데 여성이 낳는 선택을 할 경우 “너 스스로 안 지우기를 택한 것이니 나한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같이 만든 아이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양육비는 줘야 한다고 반박하면 “그럼 남자는 선택권이 없냐. 나도 내 인생을 구할 권리가 있다”고 나왔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그런 흐름이 몇 번 반복되면 질려버린 여성은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안 나타나는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게 된다. 민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양육비를 받아서 키우려 하면 자기는 낙태하라 했으니 책임 없다고 하고, 안 달라고 하면 살기가 너무 힘들고 진짜 딜레마인 것”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양육비 소송을 진행해 승소한 민지는 남자로부터 “내 옆에서 아이가 커 가는 걸 보지도 못하는데 양육비 주는 게 좀 돈을 뜯기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이 바쁘다며 면접 교섭을 거부해놓고 ‘괜히 생돈 나가는 느낌’이라고 하는 건 민지의 말처럼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것”이다. 그나마도 소송을 하기 전에는 월 20만원씩 주겠다는 말만 하고 5~6개월간 한 번도 보내지 않은 돈이었다.

 

하린은 연을 끊었다가 재작년에 다시 연락 온 남자에게 양육비를 달라고 했다가 “주소 알려주면 신용카드 하나 보낼 테니 그걸로 쓰라”는 답을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디 가서 카드를 긁는지 다 나올 테고, 예전에 폭행당한 전력도 있는데 남자에게 주소를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계좌번호 찍어주면 거기로 보내라고 했더니 남자는 결국 또 잠수를 탔다.

 

남자가 ‘같이 양육하자’고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임진다는 건 말뿐, 실질적인 부양은 하지 않는 사례가 흔했다. 

 

고등학생 때 아이를 갖게 된 민지는 대학생인 아이 아빠와 바로 동거를 시작했지만 출산 직전 헤어졌다. 당장 아기가 태어나는데 남자는 취미 생활을 한다며 집에 자꾸 파충류를 사들였다. 한 마리에 40만~50만원씩 하는 거미를 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경제력이 없는 민지는 아무 말도 못했다. 탈출한 뱀을 잡아오거나 거미 먹이로 쓸 귀뚜라미를 키우는 등 뒤치닥꺼리는 모두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민지 몫이었다. 그 상태로 10개월을 지내다가 결국 분노가 폭발해 그 길로 미혼모 시설에 들어가버렸다.

 

재인 역시 말로만 같이 살자고 하고 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 남자를 신뢰할 수 없어 과감히 연락을 끊었다. 적어도 어디서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부모님은 무슨 말로 설득할지 등을 논의해야 하는데 산후조리원을 퇴원할 시점이 되도록 남자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재인은 “제가 남자라면 제 부모님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같이 살겠다고 할 것 같은데 그런 제스처도 전혀 없었고, 이 사람이랑 같이 살면 내가 생 고생하겠다 싶어서 헤어지자고 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9604

 

①[단독] 애 아빠 없이 ‘나홀로 출산’… “극도의 패닉 상태서 범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8352

 

②‘국가의 부재’ 속에 아기가 떠난 그날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2500544

 

③벼랑 끝 내몰려 ‘아이 버릴 결심’ 하기까지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00163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20264

 

⑤“엄마를 보호하는 게 영아 지키는 길”… ‘비정한 모정’ 다시 본 그 판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00252

 

⑥“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897

 

⑦“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915

 

⑧외국인 미혼모와 ‘무등록’ 아동…“아이 성년 되면 생이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9510570

 

⑨“가부장적 체류 제도가 ‘투명 아동’ 양산…핏줄·혼인 중심 틀 깨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0203

 

⑩‘살아남은 유기 영아’ 이야기…원가정도, 새 가정도 없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2263

 

⑪“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못해요”… ‘버팀목’ 없이 고립되는 청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02617

 

⑫[좌담회] “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생부에게 더 책임 물어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13086

 

에필로그 - 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4502371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손예진 '순백의 여신'
  • 손예진 '순백의 여신'
  • 이채연 '깜찍하게'
  • 나띠 ‘청순&섹시’
  • 김하늘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