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마다 발의 건수로 현역의원 평가
의원들 실적 올리려 ‘청부입법’ 꼼수도
21대 국회 2만2670건 발의 ‘역대 최다’
시민단체·언론도 발의 수로 평가 만연
윤재옥 “어렵고 힘든 문제는 뒤로” 일침
의원들 ‘양적 지표’ 관행 개선에 공감
“정량평가 비중 줄이고 정성평가 늘려야”
‘법안의 질’ 평가 기준 합의 쉽지 않아
‘입법영향분석’ 도입 필요성 꾸준히 제기
일각선 ‘의원 입법권 침해’ 우려 지적도
“통과 여부는 신경 쓰지 않고 법안 발의 숫자만 늘려서 국회가 ‘입법 공장’이냐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지난 9월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 중 한 말이다. 그는 “(국회가) 어렵고 풀기 힘든 문제들은 뒤로 미루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고, 빨리 풀 수 있는 쉬운 문제들에만 집중한다”고 말했다. 3선을 지낸 윤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집권 여당 원내 사령탑으로서 우리나라 국회의 ‘법안 남발’ 문제를 반성한 것이다.
21대 국회 임기가 반년여 남은 가운데 입법 공장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국회를 두고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 21대 국회의원들이 쏟아낸 법안은 5일 기준으로 2만2670건으로, 이미 20대 국회(2만1594건)를 훌쩍 뛰어넘어 역대 국회 중 최대 발의 기록을 경신한 터다. 의원 간 무리한 성과 경쟁에 따른 ‘부산물’이란 걸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법안 남발은 결국 입법 품질의 저하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 개선을 위한 제도·사회문화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미 국회 안에서부터 나온다.
◆입법영향분석, ‘입법 공장’ 오명 지울까
당장 국민의힘 윤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법안 남발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대책으로 ‘입법영향분석’을 제안했다. 그는 여기서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21대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길 기대한다”고 했다. 이 제도는 의원 법안이 정치행정·사회문화·경제산업 등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미리 예측·분석하는 절차다. 정부 발의 법안의 경우 규제영향분석·규제개혁위원회 등을 거치지만 의원 법안은 이런 절차가 없어 법안 남발이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미 10년여 전부터 제안됐던 제도다. 19·20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결과물을 내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 국회에선 올 7, 8월 국회 운영위원회 운영개선소위원회에서 총 두 차례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이 논의됐다. 대개 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법안 남발에 대한 문제 의식에는 공감한다는 의견을 냈다. 운영개선소위 회의록(8월23일)을 보면,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위원이 “국회 차원에서 입법 발의가 과다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은 좀 필요한 것 같다”고 했고, 국민의힘 소속 이양수 소위원장은 “법안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그다음에 법안 숫자만 계속 늘어나고 좀 더 숙고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다음에 결정돼야 될 법안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오는 걸 보면서 결국 이런 법(입법영향분석)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제도에 대한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당장 위원들 사이에서도 ‘입법권 침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민주당 이용우 위원은 “입법영향분석을 통해서 (법안 발의를) 한다면 급변하는 체계 속에서 과연 우리가 적절한 입법을 할 수 있느냐, 거의 위헌적인 사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법안 발의 전 입법영향분석을 의무화할 때에만 유효해 보인다. 같은 당 송기헌 위원은 관련 법안 중 신정훈·정경희 의원안을 거론하며 “발의한 다음에 재량으로 할 수 있다고 하면 의원의 입법권을 제한하는 데 큰 영향이 없지 않은가”라고 지적했다.
◆“정량 평가부터 손봐야” 목소리도
“시민단체나 언론이나 주요 정당에서 자체 반성이 더 필요하다.”
민주당 오 위원은 운영개선소위 회의에서 입법영향분석에 대해 의견을 내던 중 이렇게 말한 뒤 “양적인 지표로 의원 실적을 평가하는 건 개선돼야 된다”고 말했다. 법안 남발 문제를 확실하게 개선하기 위해선 입법영향분석 도입 이전에 의원을 대상으로 한 ‘정량 평가’ 관행부터 손봐야 한단 것이다.
실제 각 정당은 소속 현역 의원 평가 지표 중 하나로 ‘법안 발의 건수’를 활용하고 있다. 민주당만 해도 선출직평가위원회가 올해 말까지 현역 의원 평가를 마칠 예정인 가운데 ‘입법 수행실적’ 평가방법으로 △대표발의 실적 △입법완료 실적 △당론채택법안 실적을 구분해 정량 평가한다는 방침이다. 시민단체·언론도 법안 발의 건수로 각 의원을 평가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만 해도 지난 9월 유권자운동본부를 출범하면서 ‘불성실 의정활동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했다. 당의 평가는 공천에 직결되는 데다 시민단체·언론 평가 또한 경선·본선 등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의원·보좌진이 무리를 해서라도 법안 발의 건수를 채우는 데 애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회 내에선 이런 압력 때문에 ‘청부입법’(정부가 법안을 만들고 의원에게 청탁해 그 의원 이름으로 제출하는 관행)이 성행하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정책 담당 보좌관 A씨는 “의원실 보좌진 총 9명 중에 정책 담당 인원은 2∼3명뿐이다 보니깐 부처에다가 ‘법안을 가져오라’고 해서 실적을 챙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국회가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탁’하는 일이 벌어지는 꼴인데, 입법권 행사의 성실성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정당·시민단체·언론의 평가가 오히려 ‘입법권 포기’를 야기하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정성 평가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또한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보좌관 B씨는 “정성 평가는 결국 객관성·중립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며 “발의된 법안의 질을 평가하는 방법이나 기준에 대해 합의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각 당에 각 법안에 대한 엄밀한 정성 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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