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여성 고용률 78.85%
중장년 男 사고방식까지 바꿔
동등한 존재 당연하다고 여겨
한국 女 교육수준 높아 희망적”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1908년 3월8일, 미국 뉴욕 러트거스 광장에 모인 1만5000여명의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외쳤다. 남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저임금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빵’은 임금 인상에 따른 생존권을, ‘장미’는 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 즉 참정권을 의미했다. 대규모 시위는 유엔이 1977년 공식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의 유래다.
116년이 흐른 2024년 한국 여성의 생존권과 참정권은 얼마나 보장받고 있을까.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2021년 기준 3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6년째 꼴찌다. 다음달 총선에 도전하는 여성 예비후보자는 남성의 5분의 1 수준이다.
“네덜란드 남성들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렇게 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죠.”
세계 여성의 날을 사흘 앞둔 5일 서울 중구 정동길 주한네덜란드대사관에서 만난 오니 얄링크(47) 공관차석(Deputy Head of Mission·부대사)은 한국과 달리 성평등 수준의 크나큰 진전을 이룬 네덜란드 상황을 전하며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가 보안정책관으로 외교관 생활의 ‘첫발’을 뗀 2003년만 해도 외교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유일한 여성 외교관이었기에 협상안이 아니라 스커트의 길이, 하이힐의 높이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얄링크 공관차석은 “처음 카운터파트(맞상대)를 만나면 나를 외교관이 아닌 일반 직원으로 착각하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다. 그는 “연수원 여성 동기 3명이 최근 대사급으로 승진했다. 과거였다면 남성 동기들 사이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했다’는 생각이 퍼졌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에 따라 승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얄링크 공관차석은 네덜란드에서 젊은 세대뿐 아니라 4050 중장년 남성들의 사고방식까지 변화한 비결로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꼽았다. 네덜란드의 여성 고용률은 78.85%(지난해 2분기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 한국은 전체 38개국 중 30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는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네덜란드의 하이테크 기업들은 여성 채용에 매우 적극적”이라며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乙)’로 불리는 현지 장비 업체 ASML을 예로 들었다.
네덜란드는 ‘정치의 성평등’도 실현하고 있다. 2022년 꾸려진 연립정부 내각에서 여성이 전체 장관직(29명)의 절반가량(14명)을 차지했다. 얄링크 공관차석은 “전례 없는 큰 성취이자 엄청난 뉴스였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11월 총선을 치른 네덜란드는 현재 새 연립정부를 구성 중이다.
얄링크 공관차석은 한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한국의 성별 격차도 금방 메워질 것이라고 본다”며 “한국 여성의 고등교육 수준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점에서 희망을 봤다. 교육은 여성의 재정적 자립을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성 롤모델의 증가가 성평등 사회로의 발전을 더 앞당길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는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 위치에 오른 여성이 많아져야 한다”며 “이러한 롤모델은 사회에 뿌리내린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깨는 데도 도움이 되고, 여성의 사회 진출도 더 활성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롤모델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얄링크 공관차석은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일화를 소개했다.
“올브라이트의 손자는 그에게 ‘할머니, 왜 사람들은 당신이 여자라는 점에 집중하죠? 국무장관은 원래 여자가 맡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올브라이트(64대) 이후 콘돌리자 라이스(66대), 힐러리 클린턴(67대)까지. 그 아이에게 여성 국무장관은 너무나 당연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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