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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저널] 조선 왕릉을 이장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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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9 22:47:58 수정 : 2024-03-29 22: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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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영릉, 경기 광주서 여주로
정조 효심으로 조성한 ‘화성 현륭원’

최근 영화 ‘파묘’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오컬트(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현상) 장르의 영화로서 이례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성공 요인으로는 무당과 굿, 무덤의 이장과 제사 등 새로운 볼거리와 배우들의 명연기, 풍수지리와 장례전문가들을 찾아간 감독의 열정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무덤을 옮기는 천릉(遷陵)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천릉을 하려면 이전의 무덤을 다시 파고 관을 꺼내는 ‘파묘’ 행위가 먼저 이루어져야 했다. 최초의 천릉은 현재의 덕수궁 근처에 조성되었던 정릉(貞陵)을 경기도 양주(楊州:현재 서울시 성북구)로 옮긴 것이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1396년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왕이 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신덕왕후와 크게 대립했던 태종은 궁궐에서 왕비의 무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신하들에게 정릉의 이전을 지시했고, 정릉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현재의 ‘정릉동’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고 원래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일대는 정동(貞洞)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릉은 옮겨졌지만, 정릉이 있었던 동네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도 원래의 위치에서 이장된 무덤이다. 영릉이 처음 조성된 곳은 경기도 광주(廣州:현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던 헌릉(獻陵:태종의 능) 좌측이었다. 세종은 태종의 무덤을 조성한 후, 그 옆자리에 자신도 묻히려고 했다. 세종의 바람대로 영릉은 처음 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러나 예종 때에 이르러 영릉의 이장이 결정되었다. 세종의 무덤을 조성할 때부터 최양선 등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덤이 들어설 땅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세조 때부터 이장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최양선은 영릉은 터가 좋지 않고 물길도 새어 나와서 무덤 터로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이곳에 무덤을 쓰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사가 끊어지고 장자가 훼손된다)’고 하였는데, 세종의 장자 문종과 손자 단종,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연이어 일찍 사망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예종은 결국 영릉의 천릉을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길지로 선정된 곳이 현재의 여주시에 소재한 영릉이었다. 여주시는 세종의 무덤이 옮겨지면서, ‘세종의 도시’라는 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브랜드가 ‘대왕님표’가 된 것 역시 세종대왕을 널리 기억하자는 뜻을 담은 것이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현재 무덤도 옮겨진 것이다. 1762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무덤이 처음 조성된 곳은 양주 배봉산 자락(서울시 휘경동)으로, 현재 이곳에는 삼육서울병원 본관이 자리하고 있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무덤 역시 터가 좋지 못한 곳에 만들어졌음을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왕이 된 후 아버지 무덤의 이장을 결정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을 찾은 끝에 새롭게 결정된 곳은 수원부,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지역이다. 무덤의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는데, 왕이 되지 못한 세자나, 아들은 왕이지만 자신은 왕이나 왕비가 아닌 경우 능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원(園)이라는 칭호를 쓴다. 정조의 무덤인 건릉(健陵)도 처음 위치에서 옮겨졌다.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후에도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순조 대에 이르러 정조의 장인 김조순이 주도하여, 건릉의 천릉에 착수하였다.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 승하 후 정조와의 합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릉이 결정되었다. 건릉의 위치가 풍수상 좋지 않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건릉은 현륭원의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무덤에 배치하는 석물 일부도 다시 만들었다. 현륭원은 고종 때 사도세자가 왕으로 높여지면서, 융릉(隆陵)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융릉과 건릉을 합하여 ‘융건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세종과 정조의 무덤도 파묘와 이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역사가 흥미롭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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