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美서 택배 도난 1억1900만건
10명 중 4명 “1년간 2차례 이상 도난”
도난 물품 따른 손실액 60억弗 달해
아마존·워싱턴 경찰 “범죄 예방” 협력
수령지, 집 아닌 경찰서 보관함 지정
“불편 감수… 하루 평균 10여명은 이용”
‘안녕, 내 이름은 조아나야.’
미국 워싱턴 연방의회에서 동쪽으로 약 4㎞ 떨어진 메트로폴리탄 경찰청 6지구 지국 건물 앞. 성인 키보다 조금 큰 로커(보관함)에는 미국 유통기업 아마존 로고와 그 옆에 나란히 자기소개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이 로커를 너의 아마존 주소록에 포함하라’는 메모와 함께 QR코드(정보무늬)가 붙어 있다. 한국 지하철역 물건 보관함처럼 생긴 ‘조아나’는 아마존이 운영하는 택배 보관함이다. 워싱턴 일대에 택배 도난이 급증하자 아마존과 워싱턴 경찰청이 협력해 경찰서 앞에 택배 보관함을 설치했다. 택배를 주문할 때 자택이 아닌 경찰서 앞 택배 보관함으로 주소를 지정하는 식이다.
16일(현지시간) 방문한 애너코스티어강 남동쪽의 랜들 하이랜드 지역은 대낮에도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했다. 6지구 지국 건물 인근 버스 정류장에는 흑인 대여섯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홈리스와 약물 중독으로 비틀거리는 사람이 수시로 지나갔다. 흑인 및 저소득층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 지역은 워싱턴에서도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경찰서 앞에 설치된 택배 보관함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알록달록하게 디자인돼 동네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6지구 지국에서 만난 마크 메이블 경관은 “이 보관함이 생긴 후로 꾸준히 잘 운영되고 있고, 도시 전체에 걸쳐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정확하지 않지만 하루 평균 10여명은 보관함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주택 앞 계단이나 아파트에 배달된 택배 도난 발생은 최근 들어 늘고 있다”면서 “하루에 최소 5∼6건씩은 택배 도난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6지구 지국은 2022년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택배 보관함을 설치하고 시범 운영에 돌입했다. 시범 운영 첫해에 약 3000건의 물품이 보관됐다고 한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은 지난 2월 워싱턴 북부 경찰청 2지구 건물 앞과 4지구 건물 앞에 아마존 보관함을 추가로 설치한다고 밝혔다. 몇달 내로 워싱턴 전 지역 경찰서에 아마존 보관함을 설치할 계획이다.
미국에서 ‘현관 해적’(Porch Pirate)이라고 불리는 택배 도난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쳐 최근 도난 범죄 증가 흐름 등의 영향으로 다시 급증하는 추세다. 주택 현관에 놓인 택배를 훔쳐 본인이 사용하거나 되팔이하는 현관 해적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워싱턴 내 절도사건은 1만3392건으로 2022년 1만814건 대비 23%나 증가했다. 차량 도난, 차량 내 절도 등은 제외한 숫자다. 워싱턴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형마트 등에서 생필품 등 절도 사건이 늘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최근 택배 도난 사건까지 늘어 골칫거리가 늘었다. 크리스마스나 여름 휴가 시즌에 빈번한 계절성 범죄였던 택배 도난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매장 방문이 어려워지자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일상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택배 도난은 미국 전역에서 늘고 있다. 현지 매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 도난 사건 증가세를 보도하고 있고, 유튜브에는 현관 폐쇄회로(CC)TV에 촬영된 택배 도난 영상이 넘쳐난다.
미 보안전문업체 세이프와이즈는 설문조사 등을 통해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택배 도난 건수가 1억1900만건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각 주당 100명씩 5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지난 1년간 택배 도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응답자는 35%였고, 그 가운데 2차례 이상 택배 도난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응답자도 40%에 달했다. 도난 물품 가격은 평균 50달러(6만9000원) 정도로 추정되고, 전체 도난 물품에 따른 손실액은 60억달러(8조3000억원)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설문 대상자의 65%는 택배 도난이 우려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아마존은 경찰과 협력해 택배 보관소를 설치했고, 미국 최대 물류회사 UPS는 인공지능(AI)을 활용, 택배 도난이 빈번한 지역을 분석하고 소비자에게 수령지를 바꾸거나 우회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물론 절도범 때문에 소비자가 자택이 아닌 택배 보관함으로 배송을 받거나 배송지를 바꾸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 당국은 택배 도난 및 절도 문제 해결 방안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워싱턴 시의회는 지난 3월, 6개월 동안 1000달러(140만원) 이상의 물품을 훔치는 행위를 중범죄로 규정했다. 다만 중범죄 절도 기준을 1000달러에서 500달러(70만원)로 낮추자는 제안은 부결됐다. 중범죄 기준을 낮춘다고 하더라도 절도를 예방할 수 없고, 중범죄자만 늘어날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됐다. 10∼20달러짜리 택배를 훔친 범죄자를 교도소에 수감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반면 택배 도난을 방치할 경우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택배 도난 사건의 경우 현재도 제대로 신고가 이뤄지지 않아 보고된 것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고, 알려진 것보다 피해가 더 크다는 지적이다. 택배 도난이 지역 사회의 치안은 물론 범죄 행위 등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치는 만큼 강경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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