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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이화여대 캠퍼스를 걷는다. 젊은 열기가 곳곳에 배여 있어 오늘따라 보이는 것 모두가 청명하고 싱싱해 보인다. 젊음이 좋긴 좋구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럽고 예뻐서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젊음을 향해 함박미소를 던진다. 여대 캠퍼스임에도 학교 안에 ‘아트하우스 모모’라는 영화관이 있어 삼삼오오 함께 가는 남자들과 나이 든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사실은 나도 영화를 보러 이곳에 왔지만, 영화를 안 보고 숲 그늘에 계속 앉아 지나가는 젊음만 감상해도 재밌는 하루가 될 듯 화창한 날씨다. 물오른 감각들이 가장 농염해지고 왕성해지고 관대해지는 계절, 만나는 나무마다 찬란한 신록으로 쭉쭉 활기차게 울창과 무성을 향해 발길을 서두르고 있다. 완연한 여름이다. 나는 근처 화장실로 들어가 겹쳐 입은 속 티 하나를 벗어 돌돌 말아 가방에 넣는다.

이대 근처는 88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처음 입성했을 때 자주 갔던 곳이라 이곳만 오면 괜히 감개가 무량해진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게 표나게 달라졌지만, 그 당시 우리들의 약속 장소는 대개 종로2가의 ‘종로서적’ 아니면 신촌의 ‘홍익문고’와 ‘독수리다방’이었다. ‘종로서적’은 잠시 사라졌다가 최근에 부활했지만, ‘홍익문고’와 ‘독수리다방’은 아직도 그 장소에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게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그 당시 낙성대 근처에 살면서도 누군가를 만날 땐 꼭 이곳에서 만나 옷도 사고, 머리도 자르고, 책을 사려고 꿍쳐 두었던 돈으로 까짓것 기분이다! 술잔과 맞바꾸었던 기억이 새삼 새록새록 웃음이 났다. 그때는 나도 새파랗게 젊은 편이라 눈과 손, 귀, 온몸에 발과 입이 달려 어디든 달려가고 무엇이든 소화했다. 개구리도 올챙이 시절엔 거의 조그만 물고기와 같아 천지 구분 못하고 얼마나 물속을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녔겠는가. 젊음이란 그처럼 허기지고 무모하고 맹목적이어서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 하지만 그 시절로, 다시 20∼30대로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지난한 시절을 무사히, 잘 건너온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워 눈물 나는데, 그래서 이 모든 게 이토록 아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하여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이 든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비록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없어도, 괜찮다. 충분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구름 사진을 몇 컷 찍는다. 문득 ‘도시인에게는 하늘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진정한 야생이다.’라고 한 칼 샌드버그의 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늘이 야생이라면 구름은 야생동물, 혹은 야생 숲인가. 이대 캠퍼스도 신촌도 어딜 가도 이제는 인공이 자연을 제압하는 곳투성이니 구름 사진 몇 컷으로 오늘을 기념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 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걸맞게.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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