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파랑새’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무시무시한 경고대로 최근 꿀벌 수가 격감하면서 생태계 보전과 인류 생존에 빨간불이 켜졌다.
꿀벌은 대표적인 화분(花粉)매개자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며 꽃가루를 옮겨 수분이 이뤄지게 해 꽃의 재생산과 종자, 열매의 결실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식량 90%를 차지하는 100대 주요 작물 가운데 70%에 달하는 작물이 꿀벌 수정에 의존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식량수급의 문제를 넘어 식물이 사라지게 되고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줘 인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5월20일 세계 꿀벌의 날(World Bee Day)을 맞는다. 유엔이 2017년 꿀벌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꿀벌의 날을 제정할 정도로 꿀벌의 수는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대전 중구 꿀벌동물병원 정년기(73) 원장은 위기의 꿀벌에게 주치의 역할을 하는 국내 1호 꿀벌전문 수의사다. 1992년 대전보건환경연구원 동물위생시험소에서 죽거나 질병이 의심되는 가축의 질병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병성감정 업무를 하다가 꿀벌과 인연을 맺었다. 양봉 농가를 다니며 아픈 꿀벌에게 어떤 약을 쓰는지 물었더니 농가마다 다른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올바른 진단과 치료법 없이 농가 각자의 방식대로 꿀벌을 돌보는 것을 보고 꿀벌수의사의 길을 택했다.
정 원장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국내 수의과 대학에는 꿀벌에 대한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고 당시 초보 꿀벌 전문의의 ‘고난의 행군’을 이야기했다. 꿀벌이 축산법상 가축으로 분류돼 소, 돼지, 닭을 취급하듯 자연스럽게 꿀벌에 대해 가르치는 외국과는 달리 국내에는 꿀벌수의사도, 관련 서적도 없었다고 한다. 정 원장은 꿀벌을 직접 키워보고, 외국 서적을 찾아보며 공부한 끝에 2013년 꿀벌동물병원을 개원했다.
꿀벌동물병원은 왕진이 기본이다. 양봉농가에서 연락을 받으면 전국 어디든 현장으로 달려간다.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직접 가서 봐야 제대로 진료할 수 있죠. 꿀벌이 어떻게 죽어 있는지, 꿀벌이 움직이는 소리와 벌통의 냄새는 어떤지 상태를 관찰합니다. 주변 환경이나 사육조건도 함께 살펴봅니다.” 정 원장이 “전국 봉침(蜂針·벌침)은 다 맞고 다닌다”면서 현장 진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겨울에는 꿀벌의 월동기라 벌통을 열지 않고 청진기나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진료하기도 한다. 원격 진료인 셈이다.
꿀벌은 2만~3만마리 무리의 봉군(蜂群)을 하나의 개체로 여긴다. 꿀벌 한 마리는 봉군의 세포나 살점에 불과한 셈이다. 꿀벌 한 마리, 한 마리를 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규명해 무리 전체가 건강해지도록 하는 게 핵심인 이유다.
정 원장은 꿀벌 치료뿐 아니라 강연 등의 일정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 원장과 함께 경기 고양시 선유동 양봉농가를 방문했다. 전날 꿀벌들이 벌통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이곳으로 왔다. 지시한 대로 잘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 벌통 온도가 높아져 꿀벌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꿀벌은 비를 맞으면 죽고 만다. 정 원장은 벌통의 공간을 넓혀주고 뚜껑을 열어 열기를 빼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대로 하니 꿀벌은 다시 벌통으로 들어갔다.
그다음 찾아간 곳은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모순철(67) 한국양봉협회 고양시지부장의 양봉장이다. 이곳에 있는 꿀벌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건강진단을 하고 잘 기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모 지부장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고 양봉의 어려움을 말했다. 꽃이 남부지방부터 강원도까지 차례로 피는 순서가 기후변화로 무너지면서 꽃을 따라 이동하며 채밀(採蜜·꿀을 땀)하는 적절한 시점을 놓치고 있다. 올해에도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이 거의 한꺼번에 피다시피 했다. 특히 꿀벌이 좋아하는 아카시아의 경우 개화 시기가 전국적으로 3일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봄철에 꿀을 5번까지 채밀했다면, 올해는 2~3번에 그쳤다. 여기에 오랫동안 내린 봄비로 꿀 농사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꿀벌이 사라지는 이유는 기후변화, 기생충, 질병, 농약, 밀원(蜜源·벌이 꿀을 빨아 오는 원천) 부족 등 다양하다. 양봉인의 자질과 기술력의 차이도 꿀벌의 생사에 영향을 준다. 수의학적 지침이 없는 약물 오남용으로 꿀벌을 죽게 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병충해는 치료할 수 있지만 기후변화는 수의사도 손을 쓸 수 없다. 기후변화로 꿀벌의 먹이인 꿀과 화분이 부족해지면 꿀벌 개체 수도 그만큼 줄어든다. 꿀벌이 화분매개곤충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 면역력을 형성하면 바이러스와 해충도 이겨낼 수 있다.
정 원장은 “그동안 쌓은 경험과 정리해온 자료를 모아 ‘꿀벌질병학’을 저술하고 싶다”면서 “꿀벌이 없어지는 일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정부 차원에서 적절한 지원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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