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 그리움 담긴 인왕산 치마바위
단종이 옥새 내준 경회루 등 폭넓게 접근
창경궁·정릉·삼전도비 등 역사의 풍경들
공간 중심으로 서울이 겪은 세월 풀어내
서울의 자서전―조선의 눈으로 걷다/ 신병주/ 글항아리/ 2만2000원
영화 ‘파묘’가 1200만 관객을 불러들이며 흥행했는데, 조선 왕릉 가운데 상당수가 파묘 후 천릉(능을 옮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인용해 중종의 천릉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큰 문제가 되었음을 적고 있다.
중종의 무덤을 옮긴 이듬해(1563)에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죽고, 2년 뒤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2년 뒤에 명종이 승하한 것, 임진왜란 때 정릉이 도굴당한 것 모두 중종의 능을 파묘하고 옮긴 탓이라 인식했던 상황을 볼 수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과 중종의 정릉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2호선의 ‘선릉’과 9호선의 ‘선정릉’이란 역명은 두 왕릉에서 따온 것이다.
1544년 중종이 처음 묻힌 곳은 경기 고양시 서삼릉이다. 중종의 정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은 명종 때의 일이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을 움직여 천릉한 것이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 성종의 선릉 곁으로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문정왕후 자신이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 못했다. 지대가 낮은 정릉은 홍수 때 재실까지 물이 차 신하들이 이곳에 무덤 쓰기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명종은 지금의 노원구에 문정왕후의 무덤을 조성하고 태릉이라 했다. ‘태릉선수촌’ ‘태릉갈비’ 등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문정왕후의 과욕 탓에 결국 한 명의 왕비도 곁에 두지 못한 채 강남 빌딩 숲 속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선릉이 가까이 있는 게 다행이다.
경복궁은 755칸 정도의 소박한 규모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했을 때 규모가 7200여칸임을 생각해보면 10분의 1 수준이다. 성리학 이념을 담아 건국한 왕조였던 만큼 검소와 절약을 반영한 것이다.
‘대비들을 위해 세운 궁궐, 창경궁’에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은 통명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문정전,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하고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등이 있다.
전란을 겪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폐허가 되었을 때 황화방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 민가 여러 채를 합해 임시 행궁으로 삼았다. 이를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는데,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이 원래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1593년부터 1608년까지 이곳에 머물다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곳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97년 고종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근대를 대표하는 궁궐로 자리 잡았다.
광해군은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술사 김일용의 말을 핑계 삼아 경희궁 창건에 착수했지만, 이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을 제거하기 위한 술수로 처음부터 정치적인 의도가 컸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세력은 폐출의 명분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꼽았다.
정조 시대로 넘어오면 창덕궁이 역사의 중심에 선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북원(北苑), 금원(禁苑), 상림(上林) 등으로 불린 창덕궁 후원은 인공미와 자연미가 어우러져 조선 왕가의 풍류와 멋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후원의 넓이는 9만여평. 조선 궁궐 후원 중 가장 넓고 아름답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부터 100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세워졌지만, 현재에는 40여채가 남아 있다. 정조는 경치가 뛰어난 10곳을 선정해 ‘상림 십경’이라 했고, 특히 왕실 도서관 규장각을 지었으며 나중에는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다.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의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정자는 존덕정(尊德亭)이다.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롯데백화점에서 성남 방면으로 고풍스러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삼전도비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 청의 일방적인 요구로 건립됐지만 당시 정세상 거절할 수 없었다. 누가 쓰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뒤따랐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명했다.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해 청의 비위에 맞춰 쓰긴 썼지만, 그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후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다시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 끝에 땅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석촌동으로 옮겼고, 송파대로 확장 때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에 두었다가, 2010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우리는 서울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책은 태종이 청계천 공사를 시작한 이유, 단종이 옥새를 내준 경회루, 용산에 독서당을 세운 성종, 욕망과 흥에 절었던 연산군의 공간, 단경왕후가 왕을 그리워하며 머문 인왕산 치마바위, 이항복과 꽃구경의 명소 필운대, 송시열과 대명의리론의 공간 혜화동 등 서울이 겪어낸 역사 속 장소들을 다방면으로 불러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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