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집단이탈 공백 메우는 간호사
법적으로 역할규정 안돼 양성화 필요
의사만으론 고령화 시대 대응 어려워
의료인력 유연한 적용 계기로 삼아야
전문의 인력 확보 당장은 현실성 없어
수가 개선·법적부담 해소 등 선행돼야
정부가 2025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확정하고 의료 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 상당수가 병원과 학교로 복귀하지 않고 있지만 의대 증원 갈등에 발목 잡힌 의료시스템 개선 작업을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100일이 넘게 전공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진료지원(PA) 간호사의 제도화와 전문의 중심병원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면서도 수십년간 쌓여온 문제를 단기간에 개선하기보다 제도 정착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PA 활용으로 인력 유연성 확보해야
2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로 인한 의료 현장의 공백을 메우는 데 PA 간호사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수술실 간호사, 임상전담간호사 등으로 불리는 PA 간호사는 병원 현장에서 의사를 대신해 수술 지원이나 처방·검사 등을 맡아왔다. 그러나 PA 간호사의 역할 등이 법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아 양성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보건복지부는 전공의들의 이탈 직후 PA 간호사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4월 말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된 PA간호사는 1만1395명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추진할 최우선 법안으로 ‘PA 간호사 합법화’ 등을 골자로 한 간호법 제정안을 포함했다.
전문가들은 ‘의료 인력의 유연성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PA 간호사가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의료개혁특위 산하 필수의료·공정보상 전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는 “이미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장관회의에서 나온 3가지 주제 중 의료 인력의 유연성 확보가 전 세계적으로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며 “의사의 전문성만으로는 고령화 시대의 보건의료돌봄 수요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택 의료의 확대에 간호사를 중심으로 한 방문 간호가 갖는 중요성 등을 고려해도 제도화는 꼭 필요하다”며 “평상시면 의사들의 반대로 어려웠을 PA 간호사나 외국 의사 면허 소지자 수용 등이 오히려 의료 인력의 유연한 적용이라는 큰 계기가 되고 있으며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환에 물꼬를 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를 위해서는 PA 간호사와 같은 전문적이고 숙련된 간호사에 대한 명칭과 역할 등이 우선 정리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신경림 대한간호협회 간호법제정 특별위원장은 “‘PA 간호사’는 명칭부터 정리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346개 병원이 참여하는 시범사업을 석달 째 했지만 그 기준조차 모호한 상황”이라며 “현재 시범사업은 예산 지연으로 전담 간호사 교육도 안 되고, 업무 범위 등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부분이 신속하게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 간호사 양성을 위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장숙랑 중앙대 적십자간호대 교수는 “우리나라에 아직 전문 간호사 양성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없는 상황”이라며 “그냥 간호사들을 몇 시간 교육시키고, 대충 투입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쌓고 성장해나간다는 게 사실 환자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장 교수는 “PA를 제도화할 거라면 좀 더 긴 호흡으로 방향성을 잡고, 교육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이 인력을 어떤 수준과 자격으로 양성할 것인지에 대해 장기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문 간호사의 역할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또 전문 간호사의 역할이 아닌 업무는 누가 맡을 것인지 등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의 중심병원 전환, 재원 확보 관건
정부는 이번 전공의 이탈 사태를 계기로 대형병원들을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전환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의를 늘려 상급종합병원 의사인력의 30∼40%를 차지하는 전공의의 비율을 낮춘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환자들은 전문의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늘어날 뿐 아니라 전공의는 수련의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지난달 28일 열린 의료개혁특위 산하 전달체계·지역의료 전문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는 전문의 중심병원 전환 모델과 이에 따른 지원사업 추진 방안에 대한 안건이 논의되는 등 차츰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은 당장 대형병원 등으로 유입될 충분한 전문의가 없다는 게 문제다.
곽재건 서울대병원 소아흉부외과 교수는 “전공의 근로여건과 교육여건이 개선되기 위해 전문의 중심병원은 결국 가야 할 길”이라면서도 “인력 문제를 생각하면 현 상황에서는 현실성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곽 교수는 “서울대병원 소아흉부외과는 최근 5년 만에 처음으로 전문의 2명이 지원했다. 사람을 구하고 싶어도 전문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공의들이 병원 밖으로 나간 지금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전문의 중심병원을 만들겠다고 하는 데 대해선 회의적”이라며 전문의 중심병원을 구축하기 위해선 수가 개선, 법적 부담 해소, 의술을 펼칠 인프라 확충 등으로 전문의 인력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문제는 돈이다. 대형병원의 전문의의 연봉은 3억원 이상으로 6000만∼7000만원인 전공의의 연봉과 5배가량 차이가 난다. 또 대형병원들이 중증·응급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하는 의료전달체계 개편이 이뤄진다면 이들 병원의 수익도 급감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상급종합병원이 앞으로 중증환자 중심의 전문의 중심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수가부터 맞춰져야 한다”며 “중증 중심으로 간다면 환자가 줄어드는 만큼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수가가 선행돼야 병원 운영이 가능하다. 개별 병원이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하겠다고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늘어나는 건보 재정 부담 속에 국민의 부담을 어떻게 최소화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정형선 교수는 “이번 전공의 이탈 사태를 통해 전공의에 의존한 병원 운영이 얼마나 사상누각의 상황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큰 소득”이라며 “앞으로 전문의 중심병원 안착을 위해 정부는 전문의 확대에 따른 의료의 질 제고에 평가해 보상하고, 병원 측은 경영 노력을 하는 두 방향의 노력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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