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의 중심 체계는 미래 없어
은퇴 의사에 숙소 등 지원 강화
적기에 정확한 진단 가능할 것
전공의 공백에 공보의 차출 반대
보건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
“의사는 죽을 때까지 환자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국내 1호 여성 보건소장’인 주혜란(77) 강원 양구보건소장은 요즘 마음이 착잡하다. 정부의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해 휴학·사직·휴진에 나선 전공의·의대생·전문의들 때문이다. 주 소장은 1975년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뒤 50년 가까이 의술을 펼치고 있는 의료계 원로다. 심정적으로 의료계 편이지만 점차 붕괴해가는 지역·필수의료 현장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11일 양구보건소 소장실에서 만난 주 소장은 작금의 의료대란 사태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전공의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공보의들로 채우려는 정부 행태에 대해서는 날을 세웠다. 주 소장은 “그렇지 않아도 지역은 의사 부족으로 인한 의료공백 문제가 상당한데 공보의가 대형병원으로 빠져나가면서 보건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고 강조했다.
주 소장은 “양구보건소에는 공보의 5명이 근무 중이었으나 전공의 사직 사태 이후 2명이 대형병원과 도립병원으로 차출됐다”며 “환자들의 진료 대기 줄이 길어지고 남은 공보의 업무가 점차 가중되고 있지만 인력 충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보건지소나 보건진료소 이외 별다른 병원이 없는 읍·면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의료사고에 대한 걱정도 주 소장이 공보의 차출을 반대하는 이유다. 그는 “우리 보건소에서 대형병원 응급실로 차출된 공보의가 저를 찾아와 의료사고를 낼까 두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며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한 공보의 입장에서 대형병원 응급실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어 “지역의료 붕괴와 의료사고 위험을 가속화하는 공보의 파견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주 소장은 1977년 28세 나이로 국내 최초·최연소 여성 보건소장이 됐다. 당시엔 여성에게 보건소장을 맡길 수 없다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지역의료 현장에서 의술을 펼치겠다”는 젊은 의사의 뜻을 높이 산 충북도지사가 그를 보건소장에 임명했다. 편한 길을 마다하고 지역 보건소를 선택한 건 예방의학 개척자이자 아버지인 고 주인호 박사 영향이 컸다. 주 소장은 “아버지는 제가 열악했던 우리나라 농촌을 돌봤으면 하셨다”고 술회했다.
경기 의정부시 보건소장, 서울 용산구 보건소장 등을 역임한 주 소장은 경기도지사와 부총리 등을 지낸 전 남편과 정치권에 얽히면서 한동안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떠난 그는 미국국립의료원에서 아시아특보, 유엔 환경기구 특보로 일하다가 2017년 귀국했다. 의료봉사를 하던 중 양구보건소장이 1년 넘게 공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해 2022년 의료현장으로 돌아왔다.
주 소장에게 지역의료를 살릴 해법을 묻자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의대생들이 공보의(36개월)보다 현역입대(18개월)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공보의 중심으로 지역의료를 꾸려서는 미래가 없다는 얘기였다. 주 소장은 은퇴한 의사들을 지역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시니어 의사들이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숙소를 제공한다든지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한 의사들이 환자를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양구보건소장에 지원할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고 했다. 주 소장은 “대단한 수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기에 정확한 진단을 통해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자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과 연계한 암 치유센터 설립도 방법으로 제시했다. 주 소장은 “수술은 서울에서 받고 요양은 지역 치유센터에서 하는 방식”이라며 “이동편의만 제공된다면 환자들도 자연 속에서 치유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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