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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있지만, 없는 ‘작업중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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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12 23:12:50 수정 : 2024-08-12 23: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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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 자재가 잔뜩 쌓인 서울 영등포구 오피스텔 공사장 1층 한쪽에서 담뱃불에 불을 붙이던 중국 출신 노동자들은 한국말이 서툴렀다. 뭘 물어도 웃으면서 손사래만 쳤다. 규모가 좀 더 큰 근처 공사장에서는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보다 더 큰 아파트 재건축 단지 현장에서 만난 관리자는 “휴게실에 에어컨이 잘 나온다”며 기자의 접근을 경계했다.

지난달 31일 ‘폭염 속 노동자’ 취재를 위해 무턱대고 공사장을 찾아다니다 결국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에 인터뷰가 가능한 조합원 섭외를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한 공사장에 휴게실이 없어 현장에 건의했고, 통하지 않자 언론에 제보했는데 그 일로 당사자와 동료 여럿이 해고를 당했다”고 섭외가 어려운 배경을 설명했다.

이지민 사회부 기자

산업안전보건법 제51조(사업주의 작업중지)와 제52조(근로자의 작업중지)에는 ‘작업중지’ 조항이 명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제52조4항은 ‘제1항에 따라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 대해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적시했다. ‘휴게실 부재’를 언론에 제보했다는 이유로 해고한 사례도 따져보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속하는 셈이다.

고용노동부가 마련한 폭염 단계별 대응 요령도 건설 현장 노동자들에게 신기루 같긴 마찬가지다. 건설노조가 지난달 말 건설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체감온도 35도 이상일 때 옥외작업을 중지한 적 있냐는 질문에 80.6%가 ‘중단 없이 일한다‘고 답했다. 폭염으로 작업 중단을 요구해본 노동자는 11%뿐이었고, 나머지는 요구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현장엔 ‘알아서 눈치 보게 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고 했다. 작업을 중지하자고 요구했을 때 “힘들면 내일부터 쉬라”든지, 근태 불량 같은 다른 핑계를 대 출근을 더 못하게 하는 식이다. 쉬자는 말을 꺼내기 쉬운 환경일수록 공사가 지연될 확률이 높고, 공사 기간이 예상치 않게 길어지면 비용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노동자들이 ‘그 말’을 못 꺼내도록 하는 게 현장 관리자들에게 주어진 중책인 셈이다.

노동자들은 작업중지를 법으로 강제해야만 지켜질 거란 현실 그 자체에 탄식한다. 올해 2월부터 ‘건설 근로자의 고용 개선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개정돼 공사장 내 화장실 설치 기준이 마련됐는데 이를 위해 투쟁했을 때와 비슷한 심경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강한수 건설노조 수석부위원장은 “화장실 몇 개 있어야 한다는 것까지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참 창피스러웠다”며 “작업중지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해당 시행규칙이 화장실도 가기 힘든 노동 환경을 반증하듯, 작업중지권 요구 역시 폭염에도 쉴 수 없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의미다.

작업중지권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존에 법제화에 반대하던 고용부는 이달 7일 입장을 전향적으로 수정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온열 질환과 관련해 노동자 건강 보호 조치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합리적 보완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법제화가 필요한 현실은 씁쓸하지만, 법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장의 처지를 정부가 살펴주길 바란다.


이지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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