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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밤에 물든 나무들… 숨어있던 낯선 얼굴 드러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입력 : 2024-08-12 22:30:00 수정 : 2024-08-12 2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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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푸른 어느 밤의 나무들

낮의 밝음서 드러나지 않은 면모 포착
나무껍질은 푸른 빛을 내는 ‘밤의 피부’
목격 대상들 자신의 감각대로 길들여
원본과 다른 특유 추상적 화면에 담아

◆푸른 어느 밤의 나무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오늘을 본다. 서로 닮은 시간과 공간에 깃들어 살아가더라도 각자의 날들 주위에 펼쳐진 풍경을 이해하는 방법이 누구나 다른 탓이다. 평범한 일상의 언저리에서 건져 낸 특별할 것 없는 장면들이 예술의 방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시선의 다름 덕분이다.

무더운 초록의 계절 속에서 정주원(31)은 밤의 나무들을 보았다. 종일 작업실에 머물다 밤늦은 시간 귀가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목격한 것이 주로 어둠에 잠긴 풍경이었기에 그랬다. 간간이 한강으로 밤 산책을 나서 바라본 나무들은 아스라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약간의 빛을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각기 다른 규칙으로 조직된 나무들의 표면이 밤의 빛을 받아 빛나며, 각기 다른 얼굴들처럼 보였다”는 이야기다. 정주원은 나무의 몸을 부드럽고도 강직하게 감싼 나무껍질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가까이 들여다보고 그 형태를 묘사하여 특유의 추상적 화면을 만들어냈다.

정주원·양하 2인전 ‘두려움은 가장 우아한 무기이다’(APO프로젝트, 서울, 2024)에 선보인 정주원의 작품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밤의 피부’(2024), ‘버블 트리’(2024), ‘나무의 밤’(2024). APO프로젝트 제공

밤의 어둠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들을 시야에서 지워내는 한편 낮의 밝음 가운데서는 드러나지 않던 대상의 낯선 면모를 발견하도록 이끌고는 한다. 까만 밤에 깊이 물든 나무껍질은 생경한 푸른 빛을 발산하는 ‘밤의 피부’(2024)가 됐다. 완전히 새로운 얼굴과 표정으로, 처음 대면하는 세계의 신비한 지형도 같은 모습으로서 말이다. 그의 근작 회화들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APO프로젝트의 전시 ‘두려움은 가장 우아한 무기이다’에 선보인다. 회화 작가 양하와 함께하는 2인전으로 7월25일 개막해 이달 말일까지 진행된다.

정주원은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6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학부 졸업 후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에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아트스페이스 보안2(2024), 지오피 팩토리(2022), 온수공간(2021), 갤러리175(2020), 갤러리3(2017)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APO프로젝트(2024),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024), 페리지갤러리(2023),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2023; 2022), 아트스페이스 풀(2018), 금천예술공장(2017), 누크갤러리(2017) 등의 기관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고 금천예술공장 8기(2016∼2017),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9기(2022∼2024)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활동했다. 올해 10월에는 서울 을지로 소재의 전시공간 포켓테일즈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어 12월에는 전북 전주의 공간시은에서 김재유 작가와 2인전을 연다.

◆투명하게 솔직하고, 시어처럼 함축적인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 내 살갗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회화는 그리는 사람의 몸과 가장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며, 작가와 작업 사이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지점, 나를 둘러싼 상황, 개인적 서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곤 했다.”

지난해 정주원이 건넨 작가노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진솔하게 밝히기를, 그의 주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서사로부터 시작되어 자신 바깥의 세상으로 가지를 뻗어 간다. 회화라는 매체를 신체성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주위의 사물들에 자신 삶의 모습을 투영하며, 자연의 요소들로부터 물감의 색채 및 질감을 연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다.

정주원은 삶 속에서 목격한 대상들 본연의 성질을 한 꺼풀 벗겨내어 자신의 방식대로 소신껏 길들인다. 한국화 물감에 백토를 섞어 그린 회화는 특유의 사근사근한 감촉으로 붓의 움직임을 유연하게 드러낸다. 눈으로 만져질 듯 촉각적인 화면은 기억 속 모호한 이미지들로 하여금 현재의 물리적 시공 안에 부피를 갖고 안착하도록 이끈다.

정주원, ‘쏟아지는 산’(2023), 아라리오뮤지엄 소장.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쏟아지는 산’(2023)은 작업실 창문 넘어 보이는 산을 소재 삼아 그린 그림이다. 산자락에 뒤덮인 낙엽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옮겨 내고자 했다. 퇴적된 지푸라기의 모습을 작품 여럿에 거듭하여 그린 까닭은 “표면에 층층이 쌓인 레이어들과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계, 그리고 묘하게 조금씩 다른 색감”이 시각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닮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주원의 풍경화는 현실의 시각적 경험을 최초의 재료로 삼지만 결과적으로 주관적 재해석에 기대어 갈무리된다. 실제 대상의 속성을 파고들기보다 자신의 의식에 축적된 감각을 추적하는 그리기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기억과 작업 과정에서의 직관적 선택에 의하여 장면은 원본과 다른 추상적 형태로서 변모한다.

정주원의 회화는 때로 투명하게 솔직하고, 때로 시어처럼 함축적이다. 그러한 양가성은 언어의 사용에서도 드러나는데, 예컨대 그가 지난 개인전 제목으로 삼은 ‘팽팽한 위로와 안 웃긴 농담들’(2024)이나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2021), ‘엄마, 미술해서 미안해’(2017; 2018) 등의 문구는 특유의 천진함과 당돌함이 뒤섞인 직설적 어투로서 복수의 화면을 아우르는 은유적 의미를 암시한다.

한편 ‘밤의 피부’와 ‘쏟아지는 산’ 등의 서정적 작품명은 추상적 외피 아래 구체적 서사를 가늠하게끔 하는 길잡이로서 역할하기도 한다. 작가의 눈에 비친 오늘의 풍경은 회화의 도구를 경유하여 비로소 공유된 날들의 초상이 된다. 화면에 담긴 공감각적 이미지의 출처는 매우 개인적이어서 가장 보편적인 그만의 진실함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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