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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반인 1944년 6월6일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프랑스 북부를 장악한 연합군은 고민에 빠졌다. 곧장 독일 본토로 진격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부터 되찾을 것인가. 연합군 사령관인 미군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자를 선호했다. 그런데 프랑스 레지스탕스(저항군)를 이끌던 샤를 드골 장군은 후자를 간절히 원했다. 장고 끝에 아이젠하워는 드골의 요청을 수용했다. 연합군이 파리를 외면하면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할 빌미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결과일 것이다.

파리 탈환의 선봉은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의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에 맡겨졌다. 2차대전 초반 나치 독일에 맥없이 무너진 프랑스가 미·영의 도움 대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국토를 되찾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배려였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는 훗날 회고록에서 “그렇게 하기로 사전에 드골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처칠의 지원이 없었다면 드골이 전후 프랑스에서 영웅으로 부상하고 대통령에 오르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1944년 8월25일 드디어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방어 책임자인 독일군 장성은 르클레르 장군에게 항복했다. 시민들은 환호하며 “드골 만세”를 외쳤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며 시작된 1500일가량의 나치 압제도 막을 내렸다. 프랑스가 2차대전 전승국 대열에 합류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얻은 것은 나치 지배를 거부한 레지스탕스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제 파리 해방 8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축사에서 “자유라는 대의를 공유하는 모든 이들이 단결해 파리를 해방시켰다”고 강조했다. 2차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한국이 처한 상황과 비교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은 국내로 진격해 일본군과 싸우는 ‘독수리 작전’을 세우고 막바지 훈련에 한창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 직후인 8월15일 일본이 갑자기 항복을 선언하며 작전은 취소됐다. 그로 인해 광복군은 참전 기회를 잃고 한국이 승전국으로 인정받을 기회도 놓쳤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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