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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가 추석이었다. 올해는 연휴가 길어서인지 더욱 붐볐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기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 필자도 추석 당일에 대구에서 고양으로 올라왔는데 무려 10시간이나 걸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흩어진 부모·형제와의 만남을 위해 이런 전쟁 같은 일을 기꺼이 치른다.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추석 아침에는 대개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와는 다르다. 참고로, 제사(祭祀)에서 ‘제’는 조부와 부친에 대한 예를 말하고, ‘사’는 고조와 증조에 대한 예를 말한다. 제사를 흔히 4대 봉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차례 이야기로 돌아가, 차례는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에 낮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것을 다 지키면 1년에 31번의 차례를 지내야 했다. 차례를 준비한 여성들의 처지에서 보면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다. 이 부담은 1939년 조선총독부가 차례를 양력 1월 1일과 음력 8월 15일 두 번으로 줄이면서 많이 완화됐다. 조선 여성의 부담을 일본이 줄여준 셈이다. 물론 일본이 이렇게 한 것은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고약한 의도에서였다.

장한업 이화여대 다문화연구소장

차례는 원래 차를 올린다고 하여 차례(茶禮)라고 했다. 차를 제물로 올렸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5세기 말 중국 남제 무황제와 관련된 기록이라고 한다. 무황제는 “내 영혼에도 짐승을 죽여 제사 지내지 말고, 단지 떡, 차, 밥, 술, 포를 진설하라”고 말했다. 이후 차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중국의 오랜 습속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중반 충담 스님이 매년 설과 추석에 미륵불에게 차 공양을 올린 것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불교식 차 공양이 제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제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려 말에 들어와 조선의 관혼상제의 규범이 된 주자가례이다. 이 가례는 “날이 새면 사당 문을 열고 신주를 모셔둔 감실의 발을 걷어 올린다. 신주마다 햇과일이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차려둔다. 그리고 찻잔과 받침, 술잔과 받침을 둔다”라고 적고 있다. 찻잔과 받침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차를 제물로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전기까지는 차를 제물로 올렸다. 17세기 이재가 쓴 사례편람에는 “차는 본래 중국에서 사용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례의 절차에 나오는 ‘설다’, ‘점다’와 같은 글귀는 모두 빼어버렸다”라는 말이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영조는 귀하고 비싼 차 대신 술이나 뜨거운 물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이로써 차 없는 차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차례는 중국의 제사 전통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차례 그 자체가 다문화적 요소이다. 그런데, 차례와 같이 우리 고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는 그렇지 않은 게 정말 많다. 고유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 ‘모든 문화의 역사는 차용의 역사’라고 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장한업 이화여대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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