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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문화·역사의 산실 ‘경성의 핫플’… 최고호텔로 우뚝 서다 [K브랜드 리포트]

입력 : 2024-10-30 06:00:00 수정 : 2024-10-29 2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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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110주년 맞은 조선호텔

독일건축가 설계 조선 최대 럭셔리호텔
유럽 고성 옮겨놓은 듯 건축미 뛰어나
엘베·레스토랑 등 서양 최신 문물 소개
정치·문화 당대 주요 명사들 드나들어

‘황제의 스위트룸’ 201호 영빈관 역할
포드 前 대통령·김구 등 VIP 머물러
한 세기 넘어 ‘서울 랜드마크’ 자리매김
레고 브릭 재현 ‘시간여행’ 특별전 마련

“진선진미한 조센호테루 낙성-본일부터 개업.”(1914년 10월10일자 매일신보)

우리나라에 호텔이 들어선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조선호텔의 설립은 일종의 ‘사건’이 됐다. 독일인 건축가가 지상 4층, 지하 1층 벽돌건물로 설계한 조선호텔은 ‘조선 최대 규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등장했다. 아르누보 양식에 바로크 지붕과 화강석으로 기단을 둘러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호평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 됐다. 조선호텔은 당시 외국인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였던 최고급 호텔이자 모던걸·모던보이들에게는 서구 문화와 최신식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산실이었던 조선호텔은 지난 110년간 서울 중구 소공동을 지키며 격동의 대한민국 역사를 목격해왔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호텔인 조선호텔이 지난 10일 개관 110주년을 맞았다. 조선호텔앤리조트 제공

◆최초 전동 엘리베이터·뷔페… 서양 문물 전파

“은주 어머니는 송빈이와 은주더러 활동사진 구경이나 갔다 오라 하였다.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 아저씨를 따라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로오즈 가아든’으로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 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오십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이왕직 악대의 음악 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태준 소설 ‘사상의 월야’(1941)에는 당시 조선호텔이 신문물이 가득한 랜드마크이자 개화기 청년인 송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으로 묘사된다. 실제 1918년 일반인 손님에게 문호를 개방한 조선호텔 후원 로즈가든은 당대에는 매우 귀했던 문화 행사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음악 연주 및 야외 영화 상영이 이뤄지는 등 국내 문화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조선호텔에서 로즈가든을 개방해 미국의 유명한 ‘파라마운트’ 회사 총대리점의 협찬으로 활동사진을 매주 교체 상영”했다는 1923년 신문 기사가 남아있기도 하다.

이처럼 조선호텔은 최고급 호텔을 지향하던 만큼 100여년 전엔 보기 힘든 최신 문물과 서양문화를 국내에 소개했다. 한식당, 양식당, 커피숍, 로비라운지, 바, 댄스홀을 갖춘 볼룸, 2개의 별실, 도서실, 헬스장 등까지 갖춘 초호화건물이었다. 욕조와 샤워기, 좌변기가 비치된 객실과 미국에서 들여온 ‘티파니’ 샹들리에와 독일제 은그릇, 아일랜드산 리넨 제품 등 고급 물품들은 개장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차량 자체가 드물던 당시지만 2층 높이의 아치형 차량 출입구와 한국 최초의 전동식 엘리베이터도 설치됐다. ‘수직 철도’라고 불린 이 엘리베이터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황금색으로 칠해져 마치 황금새 한 마리가 비상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1914년 22만4297㎡ 대지에 5개층 규모로 세워진 조선호텔 모습. 바로크 지붕과 화강석으로 기단을 둘러 전반적으로 안정감을 더한 몸체로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개화기 서양의 최신 문물을 받아들이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조선호텔은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국내 최초로 프랑스 음식과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고, 한국 최초의 뷔페와 아이리시펍이 시작된 곳으로 새로운 미식문화를 선도했다. 1924년 국내 최초로 등장한 조선호텔 내 프렌치 레스토랑 ‘팜코트’가 문을 열었으며, ‘선 라운지’에서는 1930년 국내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팜코트의 통유리 온실 안은 이국적인 나무가 놓여 있는 공간에서 세련되게 차려입은 당대의 명사들이 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담소를 나누었다.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오픈한 최초의 뷔페 레스토랑은 1970년대에 오픈한 ‘갤럭시(Galaxy)’로 현재 웨스틴 조선 서울의 뷔페 레스토랑 ‘아리아(Aria)’의 전신이 된 곳이다. 오찬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와 콜드미트, 생선, 치즈 등 서양인들을 위한 양식 메뉴들을 비롯해 한국인들을 위한 다양한 한식 메뉴를 선보였다. 이후 뷔페는 곧 트렌드가 되어 조선호텔을 필두로 모든 호텔이 뷔페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조선호텔 재건축 후 개관한 뷔페 레스토랑 ‘갤럭시’는 ‘카페 로얄’로 간판을 변경했다가 2008년 지금의 ‘아리아’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근·현대 역사의 현장… 201호에 묵은 인물들

1914년 문을 열면서부터 대표 호텔로 자리매김한 조선호텔의 숙박객 명단은 정치, 사회는 물론 예술과 문화의 주요 인사들로 빼곡하다. 특히 ‘임페리얼 수우트(imperial suite·황제의 스위트룸)’라고 불리던 특실 ‘201호’에는 1940∼50년대 격동의 시기, 해방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들이 거쳐 갔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조선호텔에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미군정을 이끌어 갔다. 조선호텔의 VIP용 201호실에 투숙한 최초의 한국인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46년 4월에 거처를 옮길 때까지 201호실을 정치 활동의 중심거점으로 삼았다.

조선호텔에 있던 국내 최초 댄스홀. 당시 댄스홀은 규제 산업이었으므로 외국인이 주로 출입하는 조선호텔에만 댄스홀이 있었다.

이후 당시 중경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도 이 전 대통령을 찾아오면서 201호에 머물렀다. 그다음 201호 열쇠를 건네받은 사람은 개화운동의 지도자이자 독립신문 발행인이었던 서재필 박사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조선 문제 최고 고문’이었던 그는 201호에 장기 투숙하며 통일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201호 마지막 VIP는 1964년 서울에서 개최됐던 태평양아시아지역관광협회(PATA) 총회 워크숍을 위해 방한한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대통령이다.

 

201호가 아니더라도 국빈이 방한한다거나 외국 고위·저명인사가 한국을 찾을 땐 대부분 조선호텔에 머물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메릴린 먼로와 밥 호프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위문공연차 한국에 왔다가 숙박했다.

 

이후에도 조선호텔은 1971년 6월 제2차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의가 열리는 등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등 미국 대통령이 국빈방문했을 때 투숙하는 등 ‘영빈관(迎賓館·국빈 전용 숙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포드 전 대통령이 키신저 국무장관, 해외 언론인 303명 등과 함께 방한하면서 건물을 통째로 빌리기도 했다. 포드 방문을 기념해 조선호텔은 야외수영장의 이름을 지금까지 ‘포드 수영장’이라고 부른다.

또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서울 중심부에 기업 본사가 들어서고 외국기업 한국지사가 발을 들이면서 조선호텔은 비즈니스 중심지로 발전해 갔다.

1924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프렌치 레스토랑인 조선호텔의 팜코트. 당대 명사들의 단골 모임 장소로, 국내 최초로 고베 소고기와 갈빗살을 제공했다.

◆110년 전 조선호텔 모습은

처음 지어졌던 110년 전에는 ‘경성조센호테루’였고 지금은 ‘웨스틴 조선 서울’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내 최초 럭셔리 호텔의 시대를 알렸던 조선호텔은 정체성을 나타내는 ‘조선’이라는 호칭을 유지하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호텔로 성장해 왔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 110년 전, 1914년의 조선호텔의 모습을 레고 브릭으로 재현한 특별전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여행(Time Travel to Heritage Josun Hotel)’을 지난달 30일부터 호텔 로비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의 시대상과 최초의 기록들을 엿볼 수 있도록 예전 건축 도면과 사진 자료를 토대로 조선호텔의 전면과 후면, 콘서트홀과 연회장, 최초의 양식당 팜 코트, 스위트 객실 201호 등 주요 공간을 10만개의 레고 브릭을 사용해 디테일하게 표현했다. 전 세계 레고 공인작가 중 한 명인 반트 김승유 작가와 협업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6·25 전쟁 직후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거쳐간 조선호텔의 임페리얼 스위트 ‘201호’.

당시의 조선호텔 모습과 지금의 웨스틴 조선 서울의 공간을 비교해보며 호텔을 방문한 고객들이 110년의 헤리티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한 이벤트다.

해당 전시는 웨스틴 조선 서울을 시작으로 11월에는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부산, 12월에는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제주에서 고객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아울러 공식 홈페이지에서 연말까지 ‘조선호텔 헤리티지 홀’이라는 테마로 1914년 개관 당시 모습을 VR로 감상할 수 있다.

조선호텔 관계자는 “110주년을 맞아 고객 감사의 의미를 담아 다양한 이벤트와 1914년 당시 모습을 레고로 재현한 전시를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110년을 이어온 노력과 열정으로 고객을 위한 최상의 환대와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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