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찾은 살바토레 페라가모 회장 단독 인터뷰/1조7200억 패션 그룹 대신 와인·호텔·레스토랑 사업 선택/“명품 패션은 럭셔러 라이프의 작은 일부분, 휴식과 와인 곁들인 미식이 진정한 럭셔리 라이프”/모든 포도밭 유기농 경작·식재료도 직접 재배해 건강한 와인·음식 선보여/명품 가문 DNA 심어 BDM으로 와인 영토 확장
11억5600만유로(약 1조7200억원). 192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은 구둣가게로 시작해 단일 브랜드로 세계적인 명품 기업의 반열에 오른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그룹의 2023년 매출 규모입니다. 당신이 이런 어마어마한 회사의 장손이라면 그룹 승계를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창업주인 조부와 같은 이름을 쓰는 장손 살바토레 페라가모(54) 회장은 많이 다릅니다. 그는 거대 패션 사업 대신 매출 규모가 50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와이너리 비즈니스를 선택했습니다. ‘형제의 난’이 빈번한 한국 대기업의 문화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와인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는 이런 ‘무모한’ 결단을 내린 걸까요. 토스카나의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일 보로 마을에서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을 돌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살바토레 일 보로(IL Borro) 와이너리 회장과 함께 진정한 ‘럭셔리 라이프’ 세상을 들여다 봅니다.
◆패션 대신 와인에 빠진 남자
현재 페라가모 그룹은 살바토레 회장의 부친 페루치오가 2021년 지주회사 회장으로 물러나면서 작은 아버지 레오나르도가 그룹 회장 겸 CEO를 맡고 있습니다. 또 살바토레 회장의 쌍둥이 동생 제임스가 패션 브랜드를 총괄합니다. 살바토레 회장이 젊은 시절 패션 사업에 발을 들였다면 지금쯤 작은 아버지 대신 그룹 회장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왜 패션이 아닌 와인에 빠졌을까요.
“저는 패션보다 더 큰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매출 기준으로만 보면 패션사업이 훨씬 더 크죠. 하지만 저는 돈보다 삶의 가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패션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실 명품 패션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명품 패션은 럭셔리 라이프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 보로에 오시면 천년 역사를 간직한 중세마을의 아름다운 호텔에서 편하게 휴식하며 포도밭을 거닐어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레스토랑 앉아 맛있는 와인을 곁들여 미식도 즐길 수 있고요. 이런 삶이 명품 패션보다 훨씬 더 럭셔리한 라이프이지 않을까요.”
그는 많은 나라를 여행한 뒤 집에 돌아 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어!”라고 외칠 정도로 토스카나가 특별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답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가 깃든 토스카나의 빼어난 풍경을 즐기면서 맛있는 음식과 일 보로의 특별한 올리브까지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삶이라고 강조합니다.
“토스카나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와인은 우리 문화의 일부죠. 다행히 쌍둥이 동생이 패션 사업에 먼저 뛰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제가 좋아하는 와인을 선택하게 됐답니다. 하하. 저는 와인 사업을 계속 키워가고 있고 가족에게 패션 사업 외에 다른 길을 제시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답니다.”
일 보로는 부친 페루치오(Ferruccio)가 1993년 마을의 땅 1100ha를 매입하면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왜 이 마을을 선택했을까요. “해발고도 250m가 넘는 일 보로는 토스카나 와인을 상징하는 키안티 클라시코 마을의 아름다운 언덕과 산맥이 코앞에서 펼쳐집니다. 특히 중세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요. 와이너리, 호텔, 레스토랑이 어우러지는 호스피탈리티 사업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인 마을이라고 판단했죠.”
28살이던 1998년 와인 사업에 뛰어든 페라가모 회장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영역을 확장합니다. 현재 일 보로 마을에 5성급 호텔 3개를 운영중이며 피렌체, 두바이, 그리스에 캐주얼한 레스토랑 ‘일 보로 투스카니 비스트로’와 프리미엄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델 보로’ 등 다양한 레스토랑도 운영중입니다. 또 내년에 싱가폴과 유럽에 추가로 레스토랑을 오픈 할 예정입니다. 그의 뛰어난 사업수단으로 15년전 500만유로를 밑돌던 와인·호텔 사업 연매출은 2023년 2200만유로(약 330억원)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건강한 포도를 한 잔에 담다
살바토레 회장이 요즘 가장 신경 쓰는 점은 오가닉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입니다. 건강한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죠. 이를 위해 2015년 유기농 인증을 받았습니다. 일체의 화학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포도밭에 허브를 심어 병충해를 방지합니다. 또 사용량보다 3배 규모 전기를 생산하는 태양광도 설비도 갖춰 탄소배출을 대폭 줄였습니다. 일 보로는 소, 양, 닭을 직접 키우며 올리브유과 꿀도 생산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야채, 과일, 허브 등 모든 식재료도 직접 재배합니다.
“오가닉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것은 포도나무를 건강하게 키워 건강한 포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면역력이 높은 건강한 사람이 질병에 잘 걸리지 않듯, 건강한 포도나무는 질병에도 잘 살아남고 지구 온난화 등 기후와 환경 변화에도 잘 적응합니다. 이런 건강한 떼루아를 한잔의 와인에 고스란히 담으려고 노력해요. 떼루아가 품종을 결정하기 때문에 토양의 특징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토양에 가장 잘 어울리는 품종을 재배한 뒤 심플하게 와인으로 담아내면 떼루아를 잘 표현할 수 있답니다. 이게 저의 와인 철학이죠. 이런 건강한 와인을 가족과 친구, 전 세계 소비자들과 나누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와인 만드는 일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일 보로 마을이 포함된 발다르노 디 소프라(Valdarno di Sopra) DOC는 매우 유서 깊은 와인 생산지역입니다. 1716년 메디치 가문 출신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가 키안티(Chianti)과 함께 고급 와인과 올리브의 생산지역으로 선포한 4개 지역 중 하나랍니다. 일 보로의 빈야드는 키안티 DOCG에도 걸쳐져 있어 키안티로도 생산할 수 있으며 같은 빈야드의 와인이 50년 전에는 키안티 레이블로 출시된 적도 잠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생산자 들은 발다르노 디 소프라 DOC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강해 이 DOC를 달고 와인을 생산합니다. 발다르노의 ‘아르노’는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강인 아르노 강을 의미하며, 아르노 강의 상류라는 의미입니다. 일보로와 페트롤로 등 10개 와이너리 주도로 2011년 발다르노 디 소프라 DOC 인증을 받았고 현재 와이너리는 22곳으로 모두 유기농으로 와인을 만듭니다.
◆장인 정신으로 빚는 산지오베제 스파클링
지난달 한국 시장에 새로 선보인 스파클링 와인 볼레 디 보로 로제 브륏(Bolle Di Borro Rose Brut)이 일 보로의 대표적인 오가닉 와인입니다. 레드 품종 산지오베제 100%로 빚으며 샴페인과 같은 전통 방식으로 만듭니다. 샴페인은 기본급은 1년, 빈티지는 3년 정도 병숙성하는데 이 와인은 무려 5년이나 병숙성을 합니다. 살바토레 회장의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감귤류의 시트러스와 잘 익은 사과향으로 시작해 삼나무향이 더해지고 잘 만든 샴페인처럼 오랜 효모 앙금 숙성이 가져다주는 구수한 빵의 풍미가 풍성하게 비강을 채우는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산지오베제 품종으로 전통방식 스파클링 와인을 선보인 토스카나 코르토나 마을 바라끼(Baracchi)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를 영입하고 5년 병숙성해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일 보로 마을은 약 200만년전 바다였기에 지금도 땅 속에서 조개화석이 발견됩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최북산 산지인 샤블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바다 미네랄을 품은 떼루아를 잘 담은 화이트 와인이 일 보로 라멜레(IL Borro Lamelle) 샤르도네입니다. 레이블에 조개를 넣어 떼루아를 잘 표현했습니다. ‘라멜레’는 조개 입쪽의 올록볼록한 곡선 부분을 뜻합니다. 차가울때는 감귤류의 시트러스향이 두드러지며 온도가 올라가면서 복숭아, 자몽향이 피어나고 파인애플 등 열대 과일향도 과하지 않게 더해집니다. 크고 햐안꽃의 이미지와 미네랄도 풍성하고 피니시에서 아주 우아한 향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신선한 산도와 순수한 과일향을 고스란히 지키기 위해 젖산발효(말로라틱)와 오크숙성을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생선회, 초밥, 해산물, 가벼운 전채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해산물에 과하게 오크 숙성한 와인을 곁들이면 비린내가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보통 샤르도네 100%로 빚지만 2023 빈티지는 샤르도네 60%, 베르멘티노 20%. 트레비아노10%, 비오니에10%로 블렌딩을 했습니다. 이 해에 병충해 피해가 심해 샤르도네 100%로 빚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명품 가문 DNA 심은 플래그십 일 보로
일 보로 보리지아노(Borrigiano)는 산지오베제 70%, 카베르네 소비뇽 30%로 빚는 ‘베이비 수퍼투스칸’ 스타일입니다. 뉴트럴 오크로만 1년 숙성해 오크향의 간섭을 최대한 줄였습니다. 체리, 라즈베리, 크렌레리의 붉은 과일향으로 시작해 잔을 흔들면 스파이시한 화이트 페퍼와 생강향이 피어나고 온도가 올라가면 숲속의 흙향과 버섯 풍미 등 3차향이 더해집니다. ‘보리지아노’는 일보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입니다.
일 보로 폴리쎄나(Polissena)는 산지오베제 100%입니다. 블루베리 등 응축된 과일향으로 시작해 온도가 오르면 오크 숙성이 부여하는 바닐라향이 과하지 않게 더해집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탄닌 덕분에 목넘김이 좋고 산도가 뒤에서 잘 받쳐줍니다. 최소 12개월(새오크 30%) 오크숙성하며 병숙성 6개월을 거쳐 출시됩니다. 폴리쎄나는 산지오베제 포도밭 근처의 유명한 호수 이름입니다.
일 보로는 와이너리 첫 작품인 플래그십 와인으로 메를로 50%, 카베르네 소비뇽 35%, 시라 15%를 섞은 전형적인 보르도 블렌딩입니다. 붉은자두, 블랙체리 등 검붉은 과일향을 모두 보여주고 시간이 지나면 스파이시하면서 달콤한 세이지의 허브향이 더해지면서 가죽, 초콜릿, 담배 등 3차향이 화려하게 피어납니다. 여기에 떼루아가 선사하는 미네랄까지 더해지고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밀한 구조감도 돋보입니다. 명품 브랜드 가문답게 프랑스에서 가장 최고급으로 손꼽히는 ‘타란소(Taransaud) T5’ 배럴에서 18개월 숙성합니다. 특히 오크통을 제작할 때 내부를 생나무가 아닌 숯으로 천천히 그을려 우아한 탄닌이 와인에 스며드는 점이 특징입니다. 2018년까지 새오크를 사용하다 점차 새오크 비중을 줄여 포도의 맛과 향 등 떼루아를 좀 더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0~15년 셀러링하면 맛과 향이 절정에 다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페라가모는 회장은 올해 ‘산지오베제의 왕’으로 불리는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BDM) 마을로 영토로 넓혀 1874년부터 와인 역사가 시작된 테누타 피니노(Tenuta Pinino)를 인수했습니다. 토스카나의 대표 레드 품종 산지오베제는 키안티 클라스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BDM이 유명한데 그중 BDM이 최고로 꼽힙니다. “유서 깊은 몬탈치노 와이너리로 생산을 확대해서 매우 기쁩니다. 페라가모 가문의 명품 DNA를 몬탈치노에도 심어 명품 BDM을 선보일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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