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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 현실 속 은밀한 저항… 고난을 예술로 극복하다

입력 : 2024-12-10 05:00:00 수정 : 2024-12-10 02: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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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故 이종빈 회고전

80년대 관습 맞서 과감한 조각 발표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저항 담아내
조각 · 드로잉 등 작품 120여점 전시

무쇠로 만든 인체형상 조각도 눈길
병고에도 협업 통해 예술 활동 지속
작업 속 단절된 육체, 고통 극복 표현

조각가 이종빈의 세대가 예술가로서 맹아를 키우던 1970년대에는 정치적 억압에 의한 강요된 침묵이 사회에 만연했다. 이 같은 억압은 개인의 내면까지 스며들어, 일상 속 자기검열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는 갈등이 도처에 상존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비상’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갖가지 모순이 표출되고,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일상 속 문물의 변화가 눈코 뜰 새 없이 진행되며, 다양한 층위의 서구 대중문화가 은밀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새로운 청년세대 감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젊은 층은 이 격동의 현실을 끊임없는 긴장과 혼란의 체험으로 대면했을 듯싶다. 공동체의 해체 과정, 개인에 대한 자각, 새로운 문화에 대한 매혹, 급격한 사회 변동과 계급적 부침, 권위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 가치의 혼란, 억눌러 묻어 놓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의 기억과 상흔, 그리고 이들 모두가 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끼쳤던 희망과 기대, 심리적 고통과 난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어딘가에 고여 표출되기를 기다렸던 이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은 하지만 끝내 길을 찾지 못했다. 

 

‘켄타우로스’

이종빈은 1981년 작품 ‘숙취’를 발표한다. 채색된 합성수지로 만든 등신대의 남자 형상이 팬티만 입고 벌건 타일 바닥에 누워있다. 인물 형상보다는 취해 널브러진 제스처가 더 두드러진다. 조각이라기보다 퍼포먼스 성격이 강하다. 당대 정치 상황을 직접 의식한 반응은 아닐지라도,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저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었다. 작품 ‘인간80-3’이나 ‘인간80-4’도 일면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이종빈의 작업은 이렇듯 기성 조각의 관습에 반하는 어법으로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 대한 은밀한 표현과 저항이 깃든 발언을 시도한다. 그의 첫걸음은 그토록 과감하기 그지없었다.

 

1994년 들어 그는 앞선 작품들이 이룩한 성취와 갑작스러운 단절을 보인다. 파쇄된 기와 조각을 이어붙인 3m 높이의 인물 입상 그리고 기와 조각을 쌓아 올려 조성한 커다란 두상과 함께, 목판을 파내거나(음각) 돋을새김(양각)한 부위를 채색해 인간 형상을 제시한 목판-부조(그림) 작품들을 내놓는다. 입상과 목판 작업 공히 윤곽만 그려진 추상적 인물상을 주 이미지로 활용하고 이전 현실성을 지닌 인물상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단절이다.

 

‘왜곡’ 

무쇠로 주조한 인체형상들도 나온다. 1997년부터다. 무쇠를 재료로 활용한 것은 그 투박한 질감으로 이들 작업의 육체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인체형상들은 극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엎드려뻗쳐’ 자세의 인물 머리는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 있고(‘왜곡’), 갈증에 엎드린 인물의 다리는 마치 올챙이처럼 하나로 붙은 채 뻗어있다(‘갈증’). 누워있는 두상의 목 부분은 각진 쇠기둥의 모습으로 길게 나와 있다. 석고로 제작된 백색 두상은 목 부분에서 뻗어 나온 3개의 나뭇가지 형태의 다리로 지탱하고 있는데, 그 다리엔 마치 가시가 돋아난 듯 돌출부가 삐져나와 있다(‘무제 1’).

 

인간과 사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의 결합과 인간 자체의 변형이 작품마다 전개된다. 초현실주의적 병치라고 볼 수 있지만, 병치라기보다는 한 몸체에 통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파격적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창조의 나무’ 연작은 흥미롭다. 나무 형상을 기본으로, 짧게 끊어진 몇몇 나뭇가지 위에 작은 사람 두상 또는 형상이 올라가 있고, 꼭대기에는 인간의 머리가 얹혀 있는 모습을, 입체 혹은 부조의 형식으로 제작한 것들이다. 여기서도 눈에 띄는 것은 식물과 인간의 결합이다. 그는 사물과 동물, 식물, 인간이 서로 구분되기보다는 연계되어있는 어떤 것이라 상상하며, 이를 탐색했다.

 

‘무거운 스케치북’

2002∼2013년의 작업은 산발적이면서도 다채롭다. 이 시기 이종빈은 공공조각 작품을 여럿 빚어냈다. 경기 성남 분당 한국디자인진흥원 코리아디자인센터 건물에 설치한 ‘신인류-신디자인’은 길이 20m, 무게 2.5t에 이르는 작품이다. 전면이 흰색 스핑크스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각진 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후면은 갈색 동판으로 마감된 뒤로 갈수록 몸체가 가늘어지는 배 모양이다. 높이 뻥 뚫린 건물 안쪽 공간에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떠 있는 이 거대한 작품은 미지의 세계로 항해하는 영혼의 몸체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마지막 작품 ‘켄타우로스’(2013)는 병고로 인해 학생들과 협업으로 제작했다. 그 때문인지 세련된 완성도를 추구하기보다는 소박하고 직정적이다. 켄타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이종 생물체다. 묘사된 디테일을 볼 때 작품은 작가의 분신으로 짐작된다. 켄타우로스는 인간과 동물의 속성을 모두 지닌 생명체다. 작가는 자신을 이런 양면성을 지닌 이질적인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작품 속 표정과 자세를 통해 이제 몸과 마음으로 이러한 자신을 수긍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생명체의 팔과 다리는 잘려져 있다. 

 

‘자소상’

그의 작업에서는 신체 일부분이 없거나 묶인 형태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유래한 것이든 육체의 병고 때문이든 작품 속에서 그는 육체적 단절의 느낌을 토로한다. 온갖 난관에 대한 절망, 회의, 혹은 좌절감을 응축해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속한 세대의 야심 찬 예술가들에게 이 같은 단절의 느낌은 어찌 보면 예술가의 역정을 지속하는 조건이자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한국 현대 조각사에 큰 획을 그은 이종빈 작가의 회고전이 11∼25일 ‘무거운 스케치북’이란 주제를 내걸고 서울 명동 금산갤러리와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동시에 열린다. 조각과 드로잉 등 120여 점을 선보인다. 

 

‘1982-1983’

이종빈은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이탈리아로 유학, 로마 국립미술아카데미 조각과에서 수학한 뒤 카라라 국립아카데미 조각과를 졸업했다. 왕성한 창작욕으로 수많은 미술관과 예술공간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2018년 타계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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