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리, 재개발 이름으로 휘발하는 풍경
점토판 형태로 폐허의 장면 순간적 포착
안경수, 풍경의 사각지대 회화로 옮겨와
과거에 묻히는 장소의 영혼 기리는 의식
두 작가 언어 전시공간에 다각도로 공명
장소의 죽음 증언함으로 기억하고 보존
언젠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모든 것들을 기리고자 하는 열망이 미술의 첫 이유이지 않았을까. 그것이 구체적인 형상이든, 관념적인 추상이든 말이다. 떠난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란 한편 남은 삶을 영속하기 위한 의지이기도 하다.
김주리(44)와 안경수(49)의 2인전 ‘무덤들’(기획 권혁규)이 지난달 21일부터 서울 계동 소재의 미술관 뮤지엄헤드에서 진행 중이다. 전시는 각각 조각과 회화로 구현된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죽음’과 ‘소멸’ 등의 열쇠말을 통하여 들여다본다. 오늘날 도시 풍경으로부터 지워진 대상들, 잊히거나 추방된 존재들을 반추하는 조형 언어를 매개 삼아 전시공간 안에 ‘무덤’을 자처하는 장면을 제시하는 시도이다.
◆김주리: 소멸과 생성의 소조
부서진 대지 위에 많은 것이 묻힌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점토 모형들, 기와지붕과 벽돌집의 축소된 형태와 구조들이 뭉개지고 짓이겨지며 근원의 땅으로 되돌아간다. 겹겹의 지층에 뒤덮이는 기억과 역사들, 사라지는 삶의 자리들.
김주리는 자신이 살던 서울 휘경동(徽慶洞) 재개발 지역의 이름과 음이 같은 ‘휘경’(揮景, 2008∼)이라는 명제 아래 무너지고 휘발하는 도시의 풍경들을 점토의 물성으로 소조해 왔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Clay Tablet’(클레이 태블릿·점토판, 2024) 연작은 그 연장선상에 놓인 작업이다. 전작에서 점토로 만든 주택의 축소모형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전시공간에 제시하는 방식을 취했던 반면, 근작은 벽면에 고정된 점토판 형태의 화면 위에 영속적으로 보존된 폐허의 장면을 선보인다. 소멸의 과정 가운데 놓인 물질적 순간을 포착한 결과물로서의 부조이다.
또 다른 연작 ‘Column’(칼럼·기둥, 2024)은 전시장 곳곳에 서로 다른 높낮이로 솟아오른 기둥의 형태를 띤 조각이다. 항공시점에서 본 건물의 평면도를 본뜬 단면들이 납작한 바닥으로부터 높다랗게 부상하여 저마다의 부피를 이루어낸 모습이다. 그리하여 재단된 집의 규격들은 각각의 공간에 내재한 깊이를 전면에 내세우듯 장소 안에 우뚝 일어선다. 벽돌의 잔해와 흙, 모르타르를 혼합하여 단단히 굳힌 몸체가 내비치는 희끗하게 붉은 빛깔로부터 건축물의 피부 아래 살덩이를 연상한다. 형태가 되었다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도시의 모래들을, 순환하는 물질들을.
몇몇의 기둥은 야외에 마련된 수반 속에 놓였다. 찰랑이는 수심에 얕게 잠긴 채, 자신의 몸이 얼마간 젖어들도록 내어준 자세로서다. 거듭 흙을 재료로 취하는 그에게 있어 물이란 소멸의 매개인 동시에 생성의 매체이기도 하다. 존재함이 영원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이치로 사라짐은 언제나 완결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무너진 자리의 지나간 부피를 기억하는 이들에 의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물질의 되새김질에 의하여.
◆안경수: 장소의 유령이 머무는 화면
안경수는 도심과 교외를 오가며 목격한 풍경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소들을 회화의 화면 위에 꾸준히 옮겨 왔다. 작가가 ‘부유하는 풍경들’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장면들은 기억되지 못하여 없는 곳이 되어 버린 주변부의 자리들이다. 전시공간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회화 ‘유치원과 화원’(2024)은 서울 보광동의 면면을 기록한 일련의 작업 중 하나로, 폐허가 된 장소의 옛 이름을 부른다.
거대한 규모의 화면은 잠시 동안 전시공간 안에 건물이 현현한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착시 속에서 장면 가까이 들어설수록 그 환영은 낱낱이 부수어진다. 평면 위에 유려하게 자리 잡은 붓의 자국들, 재단한 듯 예리한 직선과 즉흥적으로 떨구었을 물감의 흔적들은 다가서는 발걸음마다 추상적인 흔적으로서 흐트러진다. 적당한 거리 밖으로 물러서야만 본연의 장소에 대한 환영을 드러내는 물감의 겹들이 새삼 생경한 어조로서 되묻는다. 그 외의 무엇을 발견하려 하느냐고. 누구의 기억 속에 스민 풍경이 장소의 유령이라면, 화면 위에 어슴푸레 부유하며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오직 그 유령이다.
실재하는 장소로부터 캔버스 위에 옮겨 온 것은 그리는 자의 기억뿐이다. 결코 원본보다 깊은 층위로 파고들 수 없으나 도리어 없던 겹을 덧입힐 수는 있는 그러한 종류의 기억 말이다. 회화의 언어로 장소를 재현하는 일이란 그렇기에 한편으로 애도의 몸짓이다. 본연의 그곳으로부터 분리된 신체를 행하여, 시시각각 과거의 시간 속에 묻히고 마는 장소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때로 무덤을 짓는 것과 무척 닮은 행위가 아닐까. 실재하는 장소의 사라짐 뒤에 그 부유하는 풍경들을 회화의 장막 아래 묻는 것이다. 상대와 작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기억하기 위해서.
‘무덤들’로 명명된 전시공간 내에서 두 작가의 언어는 다각도로 공명한다. 무너지는 것들, 사라지고 잊히는 곳들을 미술의 물성으로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는 장소의 죽음을 증언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보전하는 행위이다. 삶은 한시적이지만 기억은 보다 오래 지속된다. 생을 다한 몸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무덤가를 찾은 이의 마음에 떠난 자의 상이 맺히듯 말이다. 그 무덤은 실제의 봉분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누구의 기억이 묻힌 곳, 어떠한 이미지와 물질이 다녀간 장소들 모두가 일종의 무덤이 된다. 절망이 아닌 애도의 자리이자 소멸 이후의 생성을 담보하는 그러한 종류의 무덤들. 퇴적된 시간의 지층 가운데 무엇을 그리워하는 무덤들이 평면과 입체의 대지 위에 솟는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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