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를 일컬을 때 우리는 보통 ‘동서남북’이란 표현이 낯익다. 그런데 판사, 검사 등 법조인들은 ‘동남북서’라고 순서를 바꿔 부르곤 한다. 이는 서울 시내에 있는 법원 5개의 서열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 서울중앙지법이 그냥 ‘서울지법’으로 불리던 시절 그 밑에 4개의 지원(支院)이 있었다. 1971년 동부지원(당시 명칭 ‘성동지원’)과 남부지원(‘영등포지원’)이 나란히 신설된 것을 시작으로 1974년 북부지원(‘성북지원’)이 문을 열었고 1989년 서부지원이 가장 늦게 추가됐다. 생겨난 순서대로 서열을 매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남북서’가 되었다. 2004년 이들은 서울지법의 지원에서 벗어나 각각 서울동부지법, 서울남부지법, 서울북부지법, 서울서부지법으로 승격함으로써 옛 서울지법과 대등해졌다.

사실 서부지원 개원은 한국 법조계의 서초동 시대 개막과 관계가 깊다. 1989년 7월 서초구 서초동에 서울지법 신청사가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중구 서소문 청사(현 서울시립미술관)를 사용해 온 서울지법 본원(本院)이 서초동으로 이사를 갔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관장하는 법원 본원의 위치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한강 남쪽에 있는 강남구, 서초구, 관악구, 동작구 등이 서울지법 본원의 관할 구역에 편입됐다. 반면 거리상 본원과 멀리 떨어지게 된 서울 북서쪽의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를 관장할 지원을 새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서부지원이다. 서울 시내 4개 지원 가운데 서열이 제일 낮았던 만큼 관할 구역의 인구도 가장 적었다.
2001년은 서부지원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이 된 해다.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 구역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용산구가 서부지원의 관할 구역이 된 것이다. 이로써 서부지원이 관장하는 구(區)는 기존의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에 용산구를 더해 총 4개로 늘어났다. 그때까지 서울지법 본원이 관할하던 용산구가 왜 서부지원으로 이관됐는지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부지원, 남부지원, 북부지원에 비해 관할 구역이 좁고 인구도 적어 업무량 차원에서 다른 지원들과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오늘날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으나 당시만 해도 주한미군 사령부가 용산구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 주한미군 관련 사건들을 서울지법 본원 대신 산하 서부지원에 맡기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옛 서부지원을 승계한 서울서부지법이 12·3 비상계엄 사태 수사를 통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내란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지난 19일 새벽 서부지법에서 발부됐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용산구 한남동의 대통령 관저를 관할하는 법원이 서부지법이란 이유로 구속영장을 서부지법에 청구했다. 구속 결정이 내려진 직후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서부지법 청사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기물을 파손함에 따라 6억∼7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영장 심사가 시작된 18일부터 이틀간 서부지법 일대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인원만 86명에 달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서부지법 입장에선 2001년 용산구가 서부지원 관할 구역으로 편입된 이래 겪은 최악의 시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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