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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소신이 중요”… ‘계엄’과 ‘탄핵’ 겪은 한 ‘공인’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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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23 10:00:00 수정 : 2025-02-23 1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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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총리 자서전에서 찾는 지혜

대한민국이 좀처럼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민생 의제를 협의하겠다며 모인 정치권은 서로의 양보만을 주장한다. 혼돈의 정치는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 해외 기관 중에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이 가운데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동차와 반도체, 의약품 등에 대한 관세 조치를 예고했다. 이는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에 대한 관세 조치라는 점에서 대형 악재다.

2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자주통일평화연대 주최로 전쟁유도 내란범죄자 윤석열 파면 촉구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가운데 탄핵 반대 시민들이 부정선거 중단 관련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외부의 공세는 강력해지고, 내부의 혼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어디서 길을 찾아야 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내민 ‘계엄’과 그에 따른 탄핵 수습이 혼돈 수습의 첫 번째 과제다.

 

이 점에 있어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고건 전 국무총리다.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내는 동안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마주했고, 노무현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서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계엄’과 ‘탄핵’을 맞이한 지금, 한국 사회는 그의 경험에서 어떤 조언을 얻어야 하는가. 그는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 조치에 대해 사표로 항의했으며,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무난하게 정국을 수습했다. 그는 자서전 『고건 회고록-공인의 길』에서 숱한 위기의 순간 자신의 결정 동력은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원칙과 소신’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혼돈 속에서 그의 조언은 귀담을 만한 가치가 있어 소개된다. 세계일보는 현 시국과 관련해 고건 전 총리의 경험과 조언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고 전 총리 측은 “자서전을 참고해달라”고 전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심판 10차 변론에 출석해 있다. 연합뉴스

◆ “내가 거길 왜 갑니까” 전두환 계엄에 항의

 

고 전 총리는 1978년 12월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 2수석을 지냈고, ‘10·26 사태’ 후 최규하 정부에서 정무 수석으로 근무했다. 격동의 시기였다. 10·26 사태 후 비상계엄은 제주를 제외한 지역에 내려져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는 이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려 했다. 이는 사실상의 군정(軍政)을 뜻한다. 당시 정무 수석이었던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 확대를 하려 하기 전에, 자신이 계엄령의 조건부 해제와 전면 개각을 핵심으로 하는 시국 건의서를 만들었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이를 읽었는지는 몰랐다고 썼다.

 

5월 17일 오후 5시, 외부에 있다가 청와대로 들어온 고 전 총리는 당시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이야기를 들었고, 이를 의결하는 국무회의가 열리니 자신이 참석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정무비서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데, 정무수석인 자신이 가게 되면 청와대가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찬성한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모양이 된다고 썼다. 고 전 총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회의에서 고 전 총리는 “내가 거길 왜 갑니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직서를 내고 청와대를 떠났다. 당시 자신의 판단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군정을 찬성할 수 없었다”며, “정무수석으로 계속 일한다면 군정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입장이 된다”고 했다. 즉,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직후 비상계엄 조치가 확대 결정되고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고건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 전례 없던 ‘권한대행’… “가장 길었던 63일”

 

이후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 경력을 쌓은 고 전 총리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중용되었다. 노태우 정부 때 관선 서울시장, 김영삼 정부 때 국무총리를 거쳤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 그를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이 주목했다. 노 대통령은 사양하는 고 전 총리를 설득해 노무현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앉혔다.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면서 헌법에 의거해 고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최규하 총리가 대행을 맡는 등 권한대행 사례는 여러 번 있었으나, 현직 대통령이 있는 가운데서의 권한대행은 고 전 총리가 처음이었다. 그는 책에서 탄핵 소추안 가결 당일 아침까지도 소추안 통과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 통과가 가시화되자, 집에 있던 『헌법학개론』부터 펼쳐 읽었다고 전해진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 표결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는 국방·외교 측 인사들과 통화해 안보 태세 강화를 주문하고, 해외 각국에 ‘한국 정부의 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권한대행 첫날부터 고 전 총리가 주력한 것은 ‘국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내외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무회의를 소집해 △ 대북 정책 등 외교 정책의 일관성 유지, △ 흔들림 없는 군 안보 태세, △ 민생 치안 확립 등 10가지 국정 현안을 차질 없이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헌법재판소 판결로 노무현 대통령이 복귀할 때까지 63일간 국정은 ‘고건 대행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는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이라고 말했다.

 

63일 동안 고 전 총리는 ‘상식과 원칙’을 기준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연설할 때는 총리실 연설담당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쓴 연설문을 사용했고, 이 기간 동안 청와대에는 신임 주한 대사 신임장 제정을 위해 한 번만 들렀다. 그는 노 대통령에게 자주 보고 자료를 올려 국정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때 소통 채널을 정치색이 옅은 정책실에 맡겼다. 노 대통령과의 면담은 없었고, 통화도 보고 자료를 올리겠다는 언급을 할 때, 사면법 개정안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때,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에 따른 인도적 지원 결정 시 등 3번에 한했다. 그는 노 대통령과의 접촉을 최대한 제한한 이유에 대해 “대통령과 내가 따로 만나 국정에 대해 깊이 의논한다면 법을 어기는 일이 되고, 사적 만남이라도 마찬가지였다”고 적었다.

여야정 국정협의회 첫 회의가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지난 20일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뒤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권영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우원식 국회의장. 국회사진기자단

◆“국정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태 후, 여야는 국정협의회를 소집해 현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사안마다 마찰을 빚으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20일, 여야 대표와 부총리, 국회의장이 만난 협의회에서도 추경안과 반도체 특별법 등 현안에 대한 타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 전 총리는 2003년 국무총리 시절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등 4개 정당과 협의해 국정 사무를 처리하는 ‘국정협의회’를 만든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여당이 사라지자 대신 만든 협의회였는데, 이 협의회를 통해 태풍 매미 피해 복구 추경안, 한·칠레 FTA 비준안, 이라크 추가 파병안 등을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고 전 총리는 국회를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과 호소를 했다고 전해진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국정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며 “국정은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다. 그 엄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자신을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로 자처한 그는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보람을 찾았으니, 공인으로서의 생활에 회한은 없다”고 말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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