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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아일랜드가 부러운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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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3-24 23:22:56 수정 : 2025-03-24 23: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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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700년 넘게 지배당하다
1921년 독립 뒤 현재 英 경제 추월
韓도 1인 GNI, 日 뛰어넘어섰지만
10년째 3만달러 박스권 아쉬워

슬플 때 노래를 부른다. 우리 민족이 그렇고, 우리와 닮았다고 하는 섬나라 아일랜드가 그렇다. 700년 넘게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인의 고난과 슬픔, 자유에 대한 열망은 그들의 노래에 담겨있다. 그중 하나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19세기 아일랜드 시인 로버트 D 조이스의 시에 선율을 붙였다. “생의 어린 봄날에 너무나 일찍 / 그녀는 내 품에서 피 흘리며 죽었네 / 부드러운 바람이 보리밭을 흔들 때”

1798년 아일랜드 반란 당시, 반란군들은 주머니에 보리 씨앗을 넣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쓰러진 자리마다 씨앗이 흩어졌고, 봄이 오면 무덤 위로 푸른 보리 싹이 돋아났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봄날의 생명력을 노래할 때, 아일랜드인은 봄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 아래 분노와 설움을 묻었다. 저항은 실패로 끝났다.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1921년에서야 비로소 평화조약을 맺었다.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함께 싸우던 동지들은 이후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돌렸다. 그 내전을 담은 이야기가 노래와 같은 제목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영화는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를 쓰는 것으로 반항을 대신한 17세 청년이 영국 군인의 총대에 맞아 목숨을 잃으며 시작한다. 살아남은 이들이 청년의 장례식에서 넋 나간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그 정서가 낯설지 않다. 우리 역시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며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로 삼켰다. 영화는 친형제가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와 닮은 점이 참 많은 나라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식민 지배로 핍박받은 역사, 굶주림의 역사, 독립 투쟁 이후 둘로 쪼개진 분열의 역사가 그렇다. 그로 인한 한(恨)의 정서도,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도 흡사하다.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뤘다. 한국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도약했고 아일랜드는 ‘켈틱 타이거‘라 불렸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극복해낸 것도 같다.

수도 더블린 중심에는 눈에 띄는 구조물이 있다. 더블린 첨탑(The Spire of Dublin)이다. 첨탑이 세워진 2003년,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달러를 돌파했다. 아일랜드의 경제가 마침내 식민 종주국인 영국을 넘어섰음을 의미했다. 높이 120m.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더블린 스파이어는 숱한 고난에도 절대 꺾이지 않은 아일랜드인의 국민적 자긍심이다. 그 자리에는 원래 영국 해군 제독 넬슨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제 아일랜드의 1인당 GDP는 10만달러를 넘어 영국(4만9463달러, 2023년 기준)의 두 배가 넘는다. 최근에는 아일랜드 시민권을 신청하는 영국인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침체된 경제와 브렉시트 이후 불안정성을 피해서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에서 무기력한 더블린을 떠나 런던을 꿈꾸던 이들이 100년 만에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3월 5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6624달러로 2년 연속 일본을 넘어섰다. 한국 직장인의 월평균 임금도 2022년 기준 399만원으로, 일본(379만원)을 추월했다. 높아진 한국의 임금 수준과 K콘텐츠 열풍 덕에 이제는 일본 청년들이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취업 비자를 받은 일본인의 수는 10년 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크다. 한국의 GNI는 10년째 3만달러대 박스권에 갇혀 성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아일랜드의 성장세는 눈부시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 등 글로벌 기업들이 유럽 본사를 둔 ’유럽의 실리콘밸리‘다. 성공의 배경은 기업 친화적 환경과 유럽연합(EU) 평균의 절반 수준인 파격적인 법인세율에 있다. 지난해 법인세 수입만 55조원에 달하며 나라 곳간이 넘쳐나고 있다. 1500개 이상 다국적기업이 만든 일자리가 27만개에 이른다. 게다가 인구의 절반이 35세 이하인 젊은 나라다.

더블린 스파이어에서 900m쯤 내려오면 리피 강변에 닿는다. 그곳에는 헐벗은 남녀 무리의 동상이 서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가슴 깊이 한(恨)이 쌓일 만하다. 아일랜드는 분명 슬프고 아픈 나라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과거형으로 만들었다. 우리와 지도 형태마저 비슷한 섬나라 아일랜드를 보며 주춤하고 있는 우리 경제를 생각하게 된다.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경제에 대한 고민은 뒤로하고 분열된 국론으로 국가적 에너지를 다 날리고 있다. 푸른 청보리와 함께 남도로부터 봄이 올라오고 있다. 아일랜드가 부러운 봄날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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