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혹시라도 검찰에서 조사받게 되면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마래이. 정 말을 해야겠으면 ‘검사님보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우수한 판사님 앞에 가서 진실을 얘기하겠습니다’ 카고 살살 긁어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자 초년병 시절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해준 이 말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본 선배였다. 입사 후 강산이 한 차례 변하는 동안 검찰은커녕 경찰 조사 한 번 받아본 적 없는지라 잠시 잊고 지냈다.

서초동으로 처음 출근한 1월15일,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체포되고, 구속되기까지 일련의 수사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그 선배의 조언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윤 대통령은 체포 당일 11시간 가까이 이어진 공수처 조사에서 일체의 진술을 거부했다. ‘공수처에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 ‘체포영장 집행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윤 대통령을 조사하기 전 200여쪽 분량의 질문지를 준비해뒀던 공수처는 사실상 백지 상태의 피의자신문조서만 남겼다. 윤 대통령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영상 녹화도 거부했고, 조서에 도장도 찍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에서 조서가 증거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피의자 날인이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이후에도 공수처의 소환 요구나 강제구인, 방문조사 등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대신 체포적부심을 청구했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직접 출석해 방어권을 행사했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해 영어의 몸이 된 뒤에도 윤 대통령은 공수처와 검찰 조사에 계속 불응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변론기일에는 꼬박꼬박 출석했다. 변호인을 통한 장외 여론전도 전개했다.
평생을 검사로 살아온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이 같은 수사 불응은 온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윤 대통령이 청구한 구속취소를 법원이 인용하고, 검찰이 즉시항고를 포기하고 석방을 지휘해 윤 대통령이 서울구치소를 나서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이가 적잖았을 것이다. 곧장 창원교도소에 수감 중인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와 국민의힘 김영선 전 의원이 각각 구속취소를 청구했다. 앞서 보석과 구속취소를 청구했다가 기각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다시 한 번 구속취소를 청구했다.
따지고 보면 윤 대통령만의 비기(祕器)도 아니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 거대 야당 수장이자 변호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도 검찰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진술거부권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기본 권리다. 기본권 행사를 놓고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긴 어렵다.
다만 법에 능통한 정치 지도자들의 선례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 노(老)검사는 “대한민국 형사사법체계는 윤 대통령 내란죄 수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으로 수사기관들이 피의자를 조사할 때 ‘백지 조서’를 남기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란 지적이다. 나 역시 만약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면, 입을 굳게 닫고 수사절차상 흠결을 찾는 데 주력할 것 같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