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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았다고 전부인가” …코 없는 코끼리, 물음표 던지다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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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15 06:00:00 수정 : 2025-04-14 20: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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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보기: 엄정순의 예술로부터

작가 엄정순, 맹인·코끼리 일화 모티브
시각 장애인들과 ‘부분 감각’ 프로젝트

코·얼굴 등 ‘실체’ 사라진 코끼리 통해
‘보는 행위’의 본질 무엇인가 화두 제시
타인을 동등하고 고유한 존재로 바라봐
시각·비장애 중심 사회 인식 전환 촉구
“명료하게 보는 것은 시이고 예언이며 종교이다.(To see clearly is poetry, prophecy and religion all in one.)” - 존 러스킨(1819∼1900)


‘본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감각이다.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심지어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본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에서야 눈으로 보았다고 믿은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하나의 상(相)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되고, 전혀 다른 감정과 해석을 낳기도 한다. 보는 것은 단순한 감각적 수용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이 얽힌 복합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코 없는 코끼리 2’.(76x56cm, 2023) 작가 제공

우리는 ‘나’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각자의 창으로 포착된 장면들은 깁고 이어 붙여져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고, 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저마다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감각의 조각들로 짜인 이 세계는 과연 실재와 얼마나 닿아 있을까. 우리는 본 것을 통해 세상의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술평론가이자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은 ‘본다’는 것을 온전히 정신적인 현상으로 분류했다. 그는 본능적인 ‘1차적 보기’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상상과 통찰이 개입된 ‘2차적 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예술가는 단순히 자기가 감각한 것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시각’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며, 그에 대한 책임과 사명감을 지닌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눈을 감고 보기

시각예술가 엄정순(64)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새로운 ‘보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한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본다’는 행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들의 눈은 복지나 교육, 예술 활동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세상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한 플랫폼이다. 보며 감각하는 ‘시각’을 기본 전제로 삼는 시각예술의 장에서, 반대로 눈의 감각을 차단했을 때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시도인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봄’이 중심이 되는 우리들의 눈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감각적 확신을 전복시킨다. 우리는 시각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반대로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정안인(正眼人)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안인이라 해서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감각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엄정순은 이들을 고유한 개별적 존재이자, 창의적 힘과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지닌 동등한 존재로 바라본다. 결핍된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익숙한 감각의 틀을 허물고 새로운 봄의 문을 열어주는 안내자인 셈이다. 엄정순의 예술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텅 빈 코끼리

본다는 것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엄정순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열반경’에는 맹인모상(盲人摸象), 즉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가 등장한다. 각자가 만진 코끼리의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이 오래된 우화를, 엄정순은 반대의 시선에서 비틀어본다. 맹인들이 인식한 코끼리의 일부는 그러면 코끼리가 아닌가?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전체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체를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엄정순은 오늘의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을 발견한다.

불교 수행자들이 하나의 화두를 붙들고 사유를 거듭하듯, 엄정순은 이 오래된 우화에서 파생된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코끼리를 감각하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부분적 감각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코끼리 만지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조각, 그림, 출판물 등으로 탄생했다. ‘봄’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상상력이 시각장애인들, 코끼리와의 만남을 통해 현실화한 것이다.

엄정순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대형 조각 ‘코 없는 코끼리’와 ‘얼굴 없는 코끼리’도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탄생했다. 코끼리에게 가장 큰 무기이자 그것을 이름 짓게 만든 코가 사라진 형상 앞에서, 지금까지 학습하며 당연시했던 인식의 구조는 붕괴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를 떼어내 버렸을 때, 우리는 어떠한 감각을 일으킬 수 있을까. 텅 비어 있는 코끼리.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묻기 시작한다. 보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불교의 공(空) 사상이 말하듯, 모든 실체는 실체가 없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텅 빈 것에서 오히려 감각은 시작된다.

‘코 없는 코끼리’. (300x274.1x307.4cm, 2022) 작가 제공

◆마음의 눈에서 피어난 세계

본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질문은 뿌리가 되어, 다양한 감각의 꽃을 피워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의문은 자연스럽게 타인과 세계를 향한 시선으로 확장됐다.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애정, 세상을 더 바르고 또렷하게 보려는 마음으로도 이어졌다. 엄정순의 예술은 궁극적으로 삶을 진실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치열한 사유이자,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이었기에 수십 년간 오해와 고정관념에 맞서야 했지만, 그는 자신과 타인을, 세상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을 향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시선을 회복하게 하는 그의 예술은 ‘시각’ 중심, ‘비장애’ 중심으로 작동해온 사회에 균열을 일으킨다. 편협한 사고와 이기적인 태도가 낳은 불화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시대에, 그의 작업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다른 감각, 희망, 극복의 언어들이 숨 쉬는 그의 작업은 올해 상반기 부산현대미술관과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등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바르게 보려는 마음과 다름에 대한 애정을 품고 걸어온 지난한 여정 속에서 엄정순이 파고들었던 질문은 이제 더없이 생생하고 날카롭게 우리를 두드린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려 하는가? 그의 조용하고 단단한 시선은 희미하고 불투명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신리사·전시기획자, 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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