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땅
아프리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땅이라는 말이 있다. ‘좁은 문’을 쓴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도 생전에 아프리카 콩고를 여행한 적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과 가없이 펼쳐진 초원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엄한 규율 속에 자란 지드에게 야성이 살아 숨쉬는 아프리카야말로 온갖 얽매임과 구속으로부터 해방감을 진정 맛보게 해주는 땅이었다. 콩고는 지드의 문학적 삶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 됐다. 50대가 되도록 미학이나 모럴에만 천착했던 그에게 휴머니티, 나아가 사회문제로까지 눈을 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이런 저런 상념의 갈피 속에 지드의 운명적 아프리카 여행도 끼어들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밤비오의 그 무도회 이야기가 저녁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주 이야기되는 것처럼, ‘원주민들은 프랑스의 점령 이전이 지금보다 더 불행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이제 설득력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았다. 내 마음은 지금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하다. 나는 지금 운명이려니 하며 체념하기에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몇 가지 일들에 대해 알고 있다. 어떤 운명의 여신이 나를 이렇게 떠밀었는지? 나는 조용히 살아왔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말을 해야겠다.” 오늘 이 시점에서도 강대국의 자원 쟁탈전의 무대가 되고 있는 아프리카에선 이런 지드의 외침이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무의식의 경계도 넘나드는 그림언어
홍콩을 경유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벌써 23시간 가까이 흘렀다. 트랩을 내리니 비로소 아프리카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케냐 나이로비행 비행기로 갈아타려면 공항에서 2시간여를 더 기다려야 한다.
시간을 죽일 겸 공항상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프리카 관문답게 상점들엔 온갖 아프리카 부족의 조각품 등이 즐비해 검은 대륙의 문화예술품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화가 김종우씨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상호를 가진 상점에 코디된 섬유 문양을 가리키며 환성을 터뜨린다. 콩고 쿠바족의 따삐(Tapi)였다. 고암 이응노의 문자추상도를 연상시킨다.
사하라사막 이남 대부분의 부족은 문자가 없어 그림언어인 문양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문자가 인간의 의식을 가둔다는 점에서 문자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방목된 상상력은 무의식의 세계와도 경계를 넘나든다. 바로 이것이 현대미술의 바탕이 되고 있다.
언어가 없으니 미개하고 사유 폭이 좁을 것이라는 것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미술이 문자를 해체하는 이유다. 그림언어(문양)는 오히려 인간의 정신적 조미료인 무의식 세계와도 접점을 이루고 있다. 회화(미술)는 언어가 아니다. 언어 없는 아프리카에서 오히려 시각예술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캐릭터로 거듭난 전통 목각
서둘러 나이로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5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공항을 빠져 나와 시내에 들어서니 오후 4시가 지나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의 여느 지방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다. 30여분이면 시내 구경도 충분할 것 같다. 산보 삼아 길가 수공예품 가게들을 순례했다.
작가의 눈은 예민한 모양이다. 권순익씨가 한 가게 쇼윈도에 내걸린 섬유 디자인에 필이 꽂혔다며 들어가 보자고 성화다. 실크프린트가 예사롭지 않아 주인에게 이것 저것 물었다. 아프리카 조각들을 회화로 재구성한 하이디 랑주의 그림을 프린트한 것임을 알게 됐다.
유럽 출신으로 케냐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하이디 랑주의 그림은 30호에 1억원대를 호가하는 작가다. 전통의 재구성 차원에서 각 종족의 다양한 목조각을 해학적으로 캐릭터화하고 있다. 전통 목각의 캐릭터화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본보기로 삼아 볼만하다.
#피카소와 자코메티가 본 아프리카
구름이 땅에 걸려 있는 나이로비의 석양은 한 폭의 그림이다. 아프리카의 첫 밤을 낭만스럽게 한다. 피카소가 불현듯 생각났다. 탄자니아 마콘데 부족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아 3일간 자리에 누웠다는 얘기가 이제는 이해가 간다. 얼마나 강한 영감을 받았을까. 실제로 피카소는 아프리카 여행 이후 추상적이며 입체적으로 변했다.
영혼을 빚어낸 거장 자코메티의 조각도 케냐 키시부족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구상,입체, 초현실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지점이다. 심지어 스필버그 감독의 ET 캐릭터도 자이레의 선조 조각상이 모델이 됐다.
아마도 한국에서 온 두 작가도 오늘밤 그런 섬광 같은 영감을 꿈꾸지 않을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한 달간 일정으로 아프리카를 화폭 삼는 이유다.
#쓰레기도 예술이 된다
다음날 캔버스 붓질 소리에 눈을 떴다. 두 화가는 벌써 화폭과 씨름 중이다. 전날 본 많은 것들이 서로 캔버스에 초대해 달라고 아우성이란다. 의미 있는 여행을 예고하는 것 같아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거리로 나섰다. 나이로비박물관 근처의 쓰레기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언뜻 보면 작가들이라기보다 고물 집하장에서 일하는 이들 같다. 콜라 병뚜껑을 비롯해 버려진 폐품들이 땜질 등을 통해 미술품으로 거듭난다. 서구의 쓰레기예술, 정크미술의 태동이 바로 여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가난이 ‘예술적 실존’의 품성을 만들었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요소는 끼어들 틈이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것이 오히려 예술과 생활을 일치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문객을 살갑게 반기는 그들에게 예술은 그저 즐거움이다. 예술가의 배에 기름이 끼면 창조적 생명력을 잃어 버린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듯싶다. 한국작가 최정화씨의 작품세계가 어렴풋이 겹친다.
#버려짐에서 진정한 나를 본다
집 안에서 쓰는 일상의 집기들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 버튼이 몇 개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접시는 음식을 담고 전화기는 전화를 거는 기능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 일상의 사물에서 기능을 제거한다면 한 번쯤 되돌아보게 된다. 마치 아침밥을 챙겨주던 어머니가 몸져 누워서야 고마움을 아는 이치와 같다. 정크미술은 바로 그런 것일 게다.
두 화가들이 아프리카에 자신을 던지는 이유도 기능적 일상에 빠진 자신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란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작업 후에 버린 장갑처럼 자신을 대하지는 않았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 살펴볼 일이다. 일할 때는 잠시 주인공인 된 듯하지만 결과물이 나오면 벗어 던지는 장갑 말이다.
예술은 결국 자신이 도구가 아니라 결과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버려진 신발 가위 화분 망치 등이 정크미술을 통해 주인공이 되듯이. 다음 행선지를 위해 다시 배낭을 둘러멘다.
나이로비(케냐)=편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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