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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황지우 시인 데뷔작 ‘연혁(沿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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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12 17:13:24 수정 : 2009-03-12 17: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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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멀리 섬들이 봉분처럼 떠 있다. 근경(近景)에는 허리를 구부린 노파 세 명이 초록의 마늘밭을 부유한다. 바다와 늙은 여인들 사이로, 무덤들이, 뻘밭의 갈대를 울타리 삼아 해변에 누워 있다. 머지않아 죽을 이들과 이미 죽은 자들의 집 너머로, 섬과 섬 사이에, 살아가야 할 자들의 생업을 부표로 띄워놓은 청태밭이 희미하게 보인다. 죽음과 노동과 생업이 아침 해무 속에 부옇게 빛난다.

운이 좋았다, 이 사진을 건진 건. 운도 노력의 결과라는 말을 이쯤에서는 인정할 수 있겠다. 미황사에서 일행이 아직 자고 있을 때 해남의 아침 바다가 궁금하여 달마산을 내려와 어란을 향해 달렸다. 황지우(57) 시인의 데뷔작 ‘연혁(沿革)’을 붙들고 내려온 첫 여정인데, 전날, 천 리 넘는 길을 단내를 삼키며 쉬지 않고 달려와 놓고도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운 터였다. 어란 못 미쳐 구부러진 해안 길을 달리다가 해변에 누워 있는 무덤들을 발견하고 급하게 차를 세워 비상등을 켰다. 봉분들은 마늘밭 끄트머리 해변에 나란히 누워서 멀리 떠 있는 섬처럼, 살아 있는 자들의 영토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삭망(朔望)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의 사후(死後)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木船)들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內地)로 가고 여인들은 환생(還生)을 위해 저 우기(雨期)의 청태(靑苔)밭 넘어 재배삼배(再拜三拜) 흰떡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연혁’ 부분)

>> ‘내지’의 황폐는 여전했던 시절

고향을 태어난 장소로만 일컫는 건 사무적 편의일 뿐이다. 유년기의 뇌파에 새겨진 햇빛과 바람과 소리와 빛깔,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려놓은 무의식의 밑그림이야말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고향이다. 황지우 시인이 태어난 곳은 전남 해남의 배다리마을이라는, 섬이 아닌 내지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고향의 원형은 완도군 고마도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 ‘솔섬’이라는 곳이다. 네 살 때 해남을 떠나 광주로 갔지만, 선대가 대대로 뿌리내려 살아온 곳은 고마도였고, 명절 때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솔섬 앞바다에 내려오곤 했다. 그리하여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작 ‘연혁’에는 솔섬이 오롯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연혁’은 이후 황지우가 보여준 다양한 실험적인 시들에 비하면 그나마 순한 서정시에 속한다. 내지와 섬, 가난과 결핍, 이승과 저승,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가 다분히 주술적인 분위기로 펼쳐지는 이 시를 쓸 무렵만 해도 아직 광주항쟁의 참극은 일어나기 전이지만, 그래도 유신 말기의 어수선한 ‘내지’의 황폐는 여전했던 시절이었다. 솔섬은 가난과 결핍과 죽음의 이미지가 그득하긴 해도 그나마 연기가 피어오르는 내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온한 공간이었다. 전날 미황사에서 누군가 어란 앞바다에도 솔섬이 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솔섬은 섬들이 즐비하게 떠 있는 다도해 해남 해안에만 두어 개나 존재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솔이 자라는 무인도의 보통명사인 모양이다.

미황사는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중턱에 있다. 지금은 남도 제일의 템플스테이 명소로 각광받고 있지만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대웅전에다 세심당(洗心堂)과 요사채, 그리고 초라한 공양간 한 집을 거느린 단출한 절이었다. 지난밤 그 시절에 만나 인연을 이어온 금강 스님과 회포를 풀고 뜨거운 구들장에서 단잠을 잤다. 이 절집의 대웅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다도해의 섬들은 짐승의 새끼들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새다. 해무 사이로 슬쩍 모습을 드러낼 때도 그런대로 신비롭긴 하지만, 맑은 날 석양녘이나 아침에 해가 뜰 때 남만(南蠻)의 이 새끼 짐승들은 황홀하다. 솔섬도 그 무리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근경(近景)에서 이름 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난 목선(木船)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다로 가는 대신 뒤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나신 솔섬 새 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南灣)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연혁’ 부분)

대중에게 각인된 황지우의 출세작은 첫 시집의 표제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일 것이다. 그 새들이 데뷔작의 솔섬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솔섬에서 울어대던 그 새들은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란 가는 아침 길은 더디었다. 가다 서기를 자주 반복해야 할 만큼 어란 해변은 아름다웠다. 이른 봄의 연초록 마늘밭과 듬성듬성 서 있는 밭가의 나무들을 배경으로 바다가 처처에서 그림이었다. 정작 어란은 포구의 이름이 풍기는 서정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그저 그런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 진부한 풍경 속에 해우밭에서 거두어 온 김가루를 가득 채운 배들이 보였다. 흡사 석탄을 실은 것처럼, 조만간에 김 가공공장으로 옮겨질 검은 가루가 화물칸에 그득했다. 사내와 아낙이 새벽부터 고단했던 노동을 마무리하며 뱃전에서 김이 오르는 해장국을 맛나게 들이키는 중이다. 미황사 아침 공양 시간은 이미 놓쳤고, 한적한 포구 주변에 문을 연 식당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숙취에 허기까지 밀려들어 속이 쓰렸다. 포기했는데… 문자가 날아들었다, 공양간을 아직 열어놓았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황지우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재앙스러운 사랑’)고 했는데, 그날 아침에는 그 문자가 나에게 ‘사랑’이었다.

“섣달 스무 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태(靑苔)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滿潮)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一家)의 심한 살냄새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土房門)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沿岸)에 남아 있었습니다.”(‘연혁’ 부분)

가난과 남루는 시적인 소재이긴 할망정 막상 그 한가운데 있으면 고문보다 고통스러운 처참이다.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를 맡는 가난을 떨치기 위해 시인의 가족은 기댈 곳 하나 없는 광주로 솔가했고, 다시 시인은 서울로 올라와 대학까지 다녔지만 가문의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제 시대 투옥됐던 부친을 반드시 본받으려 했던 건 아닌데 유신시절 학내 시위에 참가한 덕분에 강제징집됐던 황지우는 1980년 광주항쟁 때 장형인 황승우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광주는 쑥밭이 되었고 지금도 금남로 상공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 광우와 나는 절대로 광주에 와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형제애를 큰형님 자신부터 배신했다. 그는 매일 시내에 나갔고 도청 앞에 모인 외신 기자들에게 마치 통역 장교 경력이 그때를 위해 있었기나 한 것처럼 물 흐르는 듯한 본토 영어로 광주 상황의 정당성과 긴급성에 대해 간증했다. 나는 유인물을 만들어 종로에 뿌렸고 청량리 지하철에서 체포되어 합수부에 끌려갔다.”(‘스님,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십니까?’에서)

그렇게 합수부에 끌려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엮였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나중에 서강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동생 광우는 고등학생 때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를 계획해 제적당했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다 후일 노동 운동가로 변신했고, 장형 승우는 스님이 되었으니, 시인과 운동가와 승려가 공존하는 이 집안의 ‘전통’은 가위 화려하다.

>> 승려·시인·노동운동가 삼형제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시(近視)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胎夢) 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石花)밭을 넘어가 인광(燐光)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연혁’ 부분)

염치없는 아침공양을 늦게 마치고, 금강 스님과 차를 마셨다. 스님은 내려오기 전 발설한 나의 용무를 꼼꼼히 새겨두었던 모양이다. 절 아래 동네의 젊은 청년들을 통해 ‘솔섬’의 위치를 취재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시인의 큰형이 ‘성불암’이라는 절을, 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 지어놓고 산다고 했다. 정작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님으로 재직 중인 시인은 떠나오기 전에도, 해남에서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남군 북일면 갈두리 해변의 ‘성불암’은 마당의 탑이나 집에 새겨진 卍자만 아니라면, 펜션 같은 건물이었다. 성불암 앞에 시인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고마도가 있고, 그 옆에 솔섬이 떠 있다. 신도도 거의 없지만 찾아오는 중생 구제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이 절의 혜당(慧幢) 스님은 출타중이었고, 관리인 오영순(76) 보살이 대신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그 보살은 “미리 연락했더라면 밥을 지어놓았을 텐데 미안하다”고 했다.

미황사 동백도 한두 송이밖에 벙글지 않았는데 이 성불암 곁 동백은 모든 봉오리를, 대단히 붉게, 활짝 열어제치고 있었다. 6·25 때 총알이 아깝다고 그물에 들씌워져 수장당한 이들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 앞바다에 혜당 스님이 절을 세웠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의 동생인 시인은 그냥 고향 인근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 것이라고 나중에 짐짓, 수정해주었다.

“내륙(內陸)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가 그물을 내린 자궁(子宮)에서 인광(燐光)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연혁’ 부분)

문화부 선임기자 jhoy@segye.com

■황지우 시인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1980년 ‘연혁’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3년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3년 ‘뼈아픈 후회’로 제8회 소설시문학상 수상

▲1999년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

▲2006년 옥관 문화예술훈장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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