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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차를 마시며] <7>낮은 자리서 대중 이끄는 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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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05 17:32:03 수정 : 2009-03-05 17: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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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불공드리는 마음처럼 극진히 해야”
◇조계종 대종사 도문 스님이 서울 조계사 법화살림 법회에서 법문을 마친 뒤 잠시 조계사 경내에서 포행을 하고 있다.
서울 조계사 법화살림 법회에서 막 법문을 마치고 나오는 도문 스님을 종무소 2층 강사 대기실에서 만났다. 익히 듣기는 했지만 절을 올리려고 하는데, 도문 스님이 먼저 방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스님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모습 한 자락을 살며시 보여줬다.

스님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죽림정사에 주석 중이다. 백두대간 한복판 장안산 자락에 자리 잡은 죽림정사는 불교의 대선사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1864∼1940) 스님의 생가가 있던 곳. 도문 스님이 30여년 각고 끝에 용성 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손(法孫)으로서 생가터를 복원하고 사찰 하나를 지은 것이다.

도문 스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생가터 복원 이야기를 장시간 꺼냈다. 그 사연은 나중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용인즉 이렇다.

#죽림정사, 애국혼 담긴 민족교육기관

조선 말 전라감사이자 당대 풍수지리의 대가인 이서구(1754∼1825)가 초두순시를 나와 장안산 자락인 죽림촌 뒷산을 바라보며 100년 이내에 이곳에 대도인이 출현해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에 나라를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번암면은 남원군에 속해 이 사연은 ‘장수군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번암면지’에 들어가 있다. 도문 스님은 30여년 전부터 역대 장수 군수를 찾아다니며 용성 스님의 생가터 복원을 건의했다. 그러나 군수마다 ‘절대농지’라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민선 군수 시대가 도래했다. 당시 신봉수 번암면장으로부터 도문 스님의 사연을 전해 들은 김상두 초대 군수는 “장수군 출신의 의인이 방치돼서는 안 될 말”이라며 생가터 복원에 앞장섰다. 일은 일사천리로 풀렸다. 용성 스님 생가터복원사업후원회에서 70억원가량을 모으고, 군비·도비·국비 등 41억원가량이 보태져 총 111억원이 투입된 대작 불사였다. 이렇게 해서 본채와 아래채를 아우르는 생가와 대웅전, 승방, 용성교육관, 용성기념관 등이 들어서는 죽림정사가 ‘장수의 대찰’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죽림정사는 용성 스님의 애국혼이 담긴 민족교육기관이기도 했다. 도내 청소년들이 벌써 수학여행과 견학을 오고 있다.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의 진면목을 안 뒤, 자신의 금생을 덮는다. 그는 용성 조사의 제자인 동헌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는데, 동헌 스님을 통해 알게 된 용성 스님의 유훈이 어찌나 장대하고 멋있는지 일평생 유훈만을 받들며 살고자 결심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백용성의 면모를 살펴보자. 구한 말인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한 그는 16세 때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 정화에 주력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를 촉진하기 위해 저술 활동에 진력했다. 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고, 선농일치의 조사선을 실천한 대선사다. 그는 한국불교 중흥과 새 나라 지도이념을 제시하는 등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도문 스님이 죽림정사를 세운 뜻은 이러한 용성 스님의 애국사상을 선양하고 꽃피우기 위해서다. 그래서 사찰 안에는 (사)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도 들어서 있다. 현재 김상두 전 장수군수가 이사장을 맡아 유지를 받들고 있다.

용성 스님은 열반 직전 맏상좌인 동헌 스님에게 유훈을 말했다.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 경전 100만권 번역과 배포, 100만명에게 불교의 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사찰을 건립할 것 등 10가지였다. 유훈 사업은 동헌 스님에게서 도문 스님으로 이어졌고, 도문 스님은 1961년부터 만사 제쳐두고 유훈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훈 받들기 어언 48년. 그는 가야의 불교전래지 경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선당지 부지를 확보했다.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 등 보물 2점까지 건지는 개가를 올렸다. 또 백제 불교전래지인 서울 서초구 우면산에 대성사를 건립했고, 신라 불교전래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에 사찰 아도모례원 등을 지어 성역화했다. 붓다의 탄생지 네팔 룸비니에 대성석가사를 착공해 완공단계에 있고, 성도지인 인도 보드가야에 대각정사 부지를 확보 중에 있다. 대성석가사가 내년에 완공되면 네팔 최대 불교 사찰이 될 것이다.

알고 보니 도문 스님의 부친도 애국지사다. 부친이 일경에 체포돼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용성 스님이 유발상좌인 부친을 만나기 위해 12차례나 면회왔다. 당시 6살이었던 소년 도문도 용성 스님을 한 번 뵌 적이 있건만, 기억은 전혀 못한다. 도문 스님은 부친 임철호 지사 때문에 받는 독립유공자 보상금을 매월 이웃돕기에 내놓고 있다.

“용성 스님은 저의 부친에게 제가 12살이 되면 출가시켜 동헌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가르침을 받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전에 스님이 될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조계사에도 용성 스님의 자취가 스며 있다. 용성 스님은 60세가 되던 해 스리랑카 다르마팔라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석가모니의 다비식 때 몸에서 나온 응결체) 3과를 기증받았다. 이 중 1과를 1930년 조계사가 7층 석탑을 조성할 때 기증했다. 이 사리는 내년에 조계사 창건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건립되는 10층 석탑으로 다시 옮겨져 봉안될 예정이다.

“동헌 스님은 용성 스님 이야기만 꺼내면 눈물부터 흘리다가 나중에는 엉엉 우셨지요.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다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럴까 싶어요.”

‘인류와 민족 문제의 해결’이 용성의 결구였다면, 이를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것은 동헌의 추진력이었다. 학자였던 동헌 스님은 스승이 하는 독립운동을 물밑에서 전광석화같이 뒷받침하며 수완을 발휘했다. 동헌 스님은 90평생 운수납자의 삶을 실천하다가 갔다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스님될 운명

도문 스님은 스승이 못다한 유훈 사업을 위해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그래서 간혹 어디가 아프다해도 상좌들이 “거짓말”이라며 믿어주지 않았다. 상좌들 모두가 은사를 ‘만능’으로 알아 도문 스님은 스스로 강건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문 스님은 스승의 유훈 사업을 자기 대에서 끝내려고 한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고, 유훈을 받드는 게 너무 힘들어 상좌들에게는 그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도문 스님의 상좌 중에는 교수, 군법사, 선방수좌, 사회운동가 등 별의별 직종의 수행자들이 다 나왔다. 그러나 개중에는 룸비니 대성석가사 주지 법신 스님처럼 스승의 유훈 사업이 제 것인 양 사찰 건립에 젊음을 다 바치는 상좌도 있어 마음 한쪽이 무겁다.

“법륜(죽림정사 주지 겸 정토회 지도법사)도 스스로 유훈을 받든다고 생각하고 이게,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닙니다. 수행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는데….”

사회공익 활동으로 막사이사이상과 만해상을 수상한 법륜 스님은 경주고를 다니다 출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도문 스님이 대학을 가라고 해도 어디서 대학 교재를 구해와서 모두 독파해 버린 뒤, “대학 공부가 시시합니다. 차라리 은사 스님에게 배우는 ‘도문 대학’을 나오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법륜 스님은 영남지역 불교학생회를 이끌면서 수재들만 끌어들여 학생회를 운영했다. 그런 법륜이 공부는 안 하고 ‘평화재단’이니 ‘좋은벗들’이니 사회단체를 만들어 분주히 쏘다니니, 도문 스님은 속이 상하는 것이다. 도문 스님은 제자를 죽림정사에 주지로 앉혀놓으면 조용할 줄 알았는데, 주변의 불쌍한 꼴을 못 보는 법륜 스님은 잘 붙어있지 않는 모양이다.

“용성이 나를 버려놨듯이 시대가 법륜이를 버려놨지요. 법륜이는 조계종 승적도 없어요. 참 안됐어요. 딱한 노릇입니다.”

상좌 학담은 또 어떤가.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는 도문 스님이 서울대 불교학생회를 지도하며 ‘즉문즉설’로 학생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자 불교에 매료됐다. 법보다 더 큰 인생 공부가 있다는 사실에 눈뜬 것이다. 그는 법관이 되려는 꿈도 접고, 도문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학담 스님은 조계종 종회의원이자 서울 종로 대승사 주지 소임을 맡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그는 미주지역 대상으로 국제포교에도 여념이 없다.

#새벽 2시30분이면 어김없이 예불

“부처님의 제자라면, 응당 모든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마음이 생겨야 하지요.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악은 짓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떤 경우라도 선행을 하고 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심(心) 청정에 이를 수 있지요.”

도문 스님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한 수행생활 3대 지침을 오롯이 실천해 왔다. 예컨대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지악수선(止惡修善), 낳고 죽는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미혹을 굴려 깨달음을 여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생활이 그것이다. 그는 수행자라면, 여기에 철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무지 잠이 없는 도문 스님은 2시30분이면 새벽예불을 올린다. 좌선하는 시간이 많아 골반은 틀어져 있다. 스님은 이미 12살 때 백양사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정진해 근현대의 대선사 만암 스님을 탄복시켰다. 도문 스님은 세수 80세를 바라보는 지금도 전국을 누비며 법(진리)을 전하는 일에 힘쓴다. 스님은 자신을 가리켜 항상 “산승은 불회”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중’ 이라는 자신을 지극히 낮춘 말이다. 그의 회상에는 위 아래가 없다. “누가 먼저 성불을 할지 모른다”며 누굴 만나도 스님이 깍듯이 대하기 때문이다.

“‘심처존불 이사불공(心處存佛 理事佛供)이라,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마음으로 극진히 해야 합니다.”

도문 스님은 이야기 대부분을 은사와 제자 이야기에 할애했지만, 그 속에 자신의 사상을 확연히 드러냈다. 용성 회상의 큰 나무로 우뚝 선 도문 스님. 늘 낮은 자리에서 맡은 일에 철두철미한 그의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롭다.

글·사진=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도문 스님은… 용성 조사 유훈 실현에 신명 바쳐…청소년·軍 포교에 앞장

1935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다. 1946년 대모암에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60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도문 스님은 흥복사·마곡사·극락사·분황사·부석사·실상사·내장사·대각사 주지를 거쳐 중앙종회 의원, 제16교구본사 고운사와 제18교구 본사 백양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조계종 대종사에 올랐다. 현재 죽림정사 조실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백용성 스님의 ‘아난(붓다의 수족 같았던 제자)’으로 널리 회자되며, 용성 조사의 유훈을 실현하는 데 지금껏 신명을 바치고 있다. 또한 청소년과 군 포교에도 많은 지원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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