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시내의 한 명상수련원에서 만난 민홍규(56)씨는 “(국새 제작을 둘러싼 논란이) 지금 마녀사냥 식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혼신을 다해 빚까지 지며 만든 국새가 문제 없이 잘 사용되고 있는데, 느닷없이 사방에서 파렴치한 사기범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작단원 이창수(46)씨의 폭로에서 시작된 ‘금 횡령과 금도장 로비설’, ‘석불 선생 제자 사칭설’, ‘현대방식 국새 제작설’, ‘황금퍼터 사업설’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입장을 밝혔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경찰 조사를 받고 싶다”고도 했다.
◇‘4대 국새’ 제작단장 민홍규씨가 지난 28일 세계일보와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국새 제작과 관련해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기자 |
“(시방서와 과업계획서, 국새제작 최종보고서를 내보이며) 당시 행자부에 제출한 자료를 봐라. 사용 재료에 금, 은, 구리, 아연만 있지 어디에도 주석 얘긴 없다. 주석을 넣으면 국새가 깨진다. 지난 26일 행안부 중간 조사 발표 때도 이런 사실은 쏙 빼고 마치 내가 계약 내용을 어긴 것처럼 발표했더라.”
―전통방식의 국새제작 기술력 보유 여부가 관건인데.
“국새와 같은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옥새 10점 가량을 1990년대 후반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한 게 있고 도록이 있다. 또 2007년 12월2일 국새 제작 당일 경남 산청 현장에서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 있다. 그날 주물에 금을 부은 뒤 경찰이 다음날까지 지켰다. 많은 금을 다룰 때는 불안하니까 미리 경찰에 보호를 요청해 산청경찰서에서 많은 경찰이 나왔다.”(그러면서 그는 당시 작업일지를 보여줬다.)
―당일 국새작업을 직접 했나 이씨가 했나.
“이미 거푸집을 다 만들어 놓고 주물에 금물을 붓는 작업이었으므로 누가 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 전 실험은 다 내가 직접 하고 이씨는 보조역할을 했다.”
―경찰에서 시연 검토 얘기가 나오는데 할 수 있는가.
“그렇다. 경찰이 이씨 얘기만 일방적으로 듣는 것 같아 아쉽다. 이씨한테 국새제작 기술력을 입증해보라고 해 봐라. 아니 이씨가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까 우리 둘한테 실물 안 보고 스케치부터 조각, 글쓰기와 전각, 주물까지 전 과정을 다시 해서 국새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누가 거짓말 하는지 알 것 아니냐.”
―국새를 만들고 남은 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은.
“오해를 안 사려고 시방서에 있는 금 손실에 관한 내용은 앞서 최첨단 현대식 기법으로 제작한 3대 국새의 시방서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거기엔 제작과정에서 금 손실률을 25%로 했다. 여기에 사전 실험 등으로 실제 금 손실이 많아 개인적으로 2㎏의 금을 더 넣었다. 그래서 국새 제작 후 최종보고서에 ‘다음 국새 제작 때는 손실분을 감안해 그만큼 금을 더 줘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4대 국새’ 제작단장 민홍규씨가 2007년 12월2일 경남 산청에서 경찰 보호 아래 전통방식으로 금을 녹여 주물에 부은 상황을 기록한 제작 일지. |
“사명감을 갖고서 국새 제작을 맡았다. 내 인건비도 따로 받은 게 없다. 1억9000만원 예산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 돈이 1억원 가까이 들어갔다.”
―이씨는 민씨 의뢰로 2007년 초에 금도장 12개, 말에 4개를 만들어 줬고, 로비용으로 사용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 거짓이다. 이씨가 만들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 중 2007년 말 4개도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이 중 하나는 지인이 부탁한 정동영 민주당 의원 것이고 나머지 3개는 (제작단에서 비서역할을 한) 박모(40)씨가 여성 프로골퍼와 사업가 2명의 의뢰를 받아와 만들어 준 것이다. 이씨한테 똑같이 금도장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거짓 주장임이 드러날 것이다.”
―정 의원은 당시 여당 대선후보였는데 모르는 사이였나. 이미경 민주당 사무총장도 거론되던데.
“전혀 만난 적도 없다. 만날 이유도 없고. (국새를 만든) 전각전 공사현장에서 아는 사람이 도장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는데 나중에 그 한자 이름이 정동영이란 걸 알았다. 이 총장은 TV에서만 본 사람이지 일면식도 없다. 도장을 만들어준 적도 없고.”
―최양식 전 차관(현 경주시장)한텐 왜 줬나.
“그분은 다른 공무원과 달리 국새 만드는 데 좋은 의견을 많이 주고 ‘우리 죽고 나도 최고의 국새를 만들자’고 격려해 줬다.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퇴임한다는 얘기 듣고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 해서 (금장)작품을 하나 해 드린 것이다.”
―평소 금도장을 선물용으로 주변에 많이 주나.
“난 예술가다. 작품 하나 해서 맘에 들어하면 줄 수 있고, 내 작품 알아주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좋다. 그런 뜻으로 준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80년대에도 그랬다. 노태우 전 대통령한테도 만들어 줬었다.”
―골퍼와 일반인에게 판 도장 값이 25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박씨가 알아서 했다. 박씨가 돈을 가져오면 세어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충 3분의 1 정도로 가늠해서 나눠줬다. 문화예술계를 잘 알면 (값을 놓고)그런 소리 못한다. 금장이 매일 나가거나 다달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몇 차례 나가는데. 똑 같은 옷인데 앙드레 김 옷은 왜 비싸냐. 먼저 문화에 대한 정서가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
―올 초 유명 백화점에서 공개돼 화제가 된 수십억원짜리 봉황국새는.
“지금까지 내가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 그것도 박씨가 하나 만들어 달라 해 만들었더니 그렇게 한 것이다.”
―한 월간지에 국새명인 운운하며 금도장 광고를 내 수천만∼수억원에 팔았다는 의혹은.
“그 광고 건도 전혀 몰랐다. 어느 날 박씨가 연락이 와 잡지사 사장 한두 번 만났는데 곧 폐업한다더라. 그런데 내가 이 광고로 엄청난 돈을 번 것처럼 음해를 당하고 있다. 그 광고 보고 도장 판 게 하나도 없는데.”
―목불 정민조 선생은 민씨가 부친(석불 정기호 선생)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경찰이 (이천 공방)압수수색할 때 10여년 전 정씨와 그 집에서 놀고 있는 사진도 나오더라. 그 사진을 보며 ‘이 형하고 참 이랬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더라. 그 형님이 (석불 선생의) 장자지만 기술 전승은 내가 받았다. 석불 선생이 아들한테 ‘목불’이라고 호를 지어준 것은 ‘나무만 다뤄라’는 뜻이었다. 나한테는 ‘쇠를 다뤄라’ 해서 호를 ‘쇠불’로 지어주셨다. 한자로는 ‘世佛(세불)’이다. 이후 난 나무 작품을 안 했다.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씨는 부친이 주물을 안 다뤘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사했나.
“석불 선생은 ‘왕이 없는 나라에 옥새는 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지금은 왕이 없는 시대니까. 그분은 1940년대 후반까지만 (주물을)했고 이후엔 동장(쇠도장)만 했다. 주물 기술은 구술로 주로 전수받았다.”
―황금 골프퍼터 사업은.
“박씨가 2007년에 한 차례 언급하더니 국새 작업 끝나고 2008년 초에 다시 ‘이 사업을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면서 도와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작했는데 기술도 없고 난 더 이상 못하겠더라. 그래서 2009년 4월 샘플만 하나 만들어주고선 앞으로는 이씨와 함께 하라고 했다. 그러자 G업체(대표 박준서)와의 협약서에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허락했다. 그런데 협약서의 계약 내용이 말도 안 되는 게 많아 없던 일로 했다. 그 후 이씨와 박씨가 나한테서 돌아섰다.”
―그럼 국새 논란은 골프 사업이 발단이라고 보나.
“그렇다. 어떻게 보면 해프닝인데 아주 거대하게 일이 만들어졌고, 전 정권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려고 이 문제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는 것 같다.”
이강은 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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