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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과잠’과 ‘노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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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1-20 17:49:11 수정 : 2012-01-20 17: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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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과시하려는 주목사회의 단면
상실된 정체성 회복할 출구 찾아야
최근 대학가와 중고등학교에서 옷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대학에서는 ‘과잠’, 즉 학교와 학과의 로고가 새겨진 야구점퍼가 유행이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서 과잠 문화가 힘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몇몇의 소위 명문대에서 비롯했다. 서울대에서 과잠을 입고 홍대앞 클럽에 출몰한 동료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곳까지 가서 학벌을 과시하면 좋니?’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냥 본인이 좋아서 그런 건데 그것을 꼭 비난거리로 삼을 필요가 있는 거야?’ 과잠 논쟁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 이슈가 됐다. 과잠에 비판적인 이들이 지적하는 바는 이렇다. 왜 과잠은 명문대생이 많이 입는가. 결국 자신의 학벌을 자랑하려는 유치한 행동이 아닌가.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
중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한 아웃도어 회사 명칭을 축약한 ‘노페’는 패딩점퍼다. 가격이 비싸기에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다 못해 부러뜨린다는 뜻으로 ‘등골 브레이커’라고도 불리는 노페는 중고등학생이 즐겨 입는, 아니 꼭 입어야 하는 옷이다. 아마도 학교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입어야 하는 교복인 셈이다. 노페 역시 학교를 넘어 사회의 논란거리가 됐다. 당연하게도 노페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워낙 비싸다 보니 부모와 아이들은 실랑이를 벌이고 학생 사이에서도 뺏고 뺏기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입을 수 있는 자’와 ‘입을 수 없는 자’의 구별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노페 착용 여부에 따라 ‘인간’과 ‘비인간’이 구별된다. 무엇이 젊은이들의 옷에 대한 열망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주목사회에 살고 있다. 주목사회는 남들의 주목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사회형태다. 주목이 관건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인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인정받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내 존재를 알아야만 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으면 그냥 투명인간일 뿐이다. 학생들이 노페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학교 밖 세상에서 학생은 단지 입시기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인정을 구할 곳은 또래집단의 세계뿐이다. 여기서 노페는 중요한 ‘인정 화폐’다. 나도 ‘입을 수 있는 인간’이야.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난 투명인간이 아니라고.

현대사회는 또한 정체성이 어려운 과제가 된 사회다.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과거에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먼 과거에는 ‘나는 상놈이야’(신분)로 해결됐다. 가까운 과거에는 ‘나는 교수야’(직업)라거나 ‘나는 현대맨이야’(직장)라는 것이 정체성의 많은 문제를 답해주었다. 말하자면 신분이나 직업, 직장이 내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신분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직업과 직장은 수시로 바뀐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체성의 단단한 ‘말뚝’을 상실했다. 과잠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정체성의 말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사회는 지극히 파편화됐다. 학교나 학과 활동은 스펙 경쟁으로 소멸됐다. 대학생들은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그냥 떠다닐 뿐이다. 나를 붙잡아 맬 말뚝이 필요해, 나도 어딘 가에 속해 있다는 표지가 필요하다고.

노페나 과잠은 분명 문제다. 상품의 착용 여부로 인간과 투명인간이 구별된다니. 과잠으로 학벌을 과시하다니. 개탄만 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바는 노페와 과잠의 또 다른 쓰임새다. 주목과 인정 화폐, 그리고 정체성의 말뚝.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가 바라는 뭔가로 대체할 수 없다면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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