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④ 헝가리, 혁명과 성자의 도시 부다페스트 - 성스러운 페스트

관련이슈 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입력 : 2012-03-15 18:20:26 수정 : 2012-03-15 18:20:2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건국 1000년에 맞춰 지은 세계 세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 눈길 1. 혁명이 지나간 자리, 코슈트 광장

부다페스트의 지하철은 낡고 비좁았다. 유럽대륙 최초로 만들어진 유서 깊은 지하철은 여전히 마자르족의 후예들을 싣고 이 도시의 지하세계를 달린다. 그 얼굴들은 내 낡은 기억 속에서 모두 한 번은 이미 본 얼굴들 같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많은 탓일까. 나는 여러 번 겪은 데자뷔 속에 다시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며 서있었다. 낯선 두 개의 시공간이 합쳐진, 드라마 속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코슈트 역에서 내렸다. 그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 같은,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뒤섞인 어느 지점에 가면 이런 느낌이 들까.

강변으로는 트램이 덜커덩 스쳐 지나가고, 물기를 품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렌지색 트램 속의 사람들은 강을 바라보느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강물 위에 던진 그 긴 시선들은 이제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영화속 마법 학교 같은 국회의사당. 첨탑의 높이는 96미터로 헝가리 건국원년 896년에서 가져온 숫자이다.
어쩐지 애잔한, 그리운 이의 낡은 옷 같은 풍경. 그리고 고개를 드니 어마어마한,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국회의사당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려한, 차라리 영화 속 마법 학교 같은.

고딕 양식의 날렵하게 솟은 첨탑들과, 나란 사람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야 겨우 끝에 다다를, 길이만 268미터가 넘는 건물. 헝가리 건국 1000년에 맞추어 지은 국회의사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고 한다. 그 앞을 지키는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그래서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작아 보이기만 하고, 광장은 터무니없이 넓어 보인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지도했던 코슈트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는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모여서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애써 도착한 국회의사당은 벌써 오늘치 내부 입장 티켓이 모두 팔려 버렸기에 관람할 수 없다고,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다. 헝가리 왕들의 황금 왕관을 기대했던 나는 맥이 빠져서, 코슈트 광장 옆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이 날씨이고, 그 다음이 운이라고 하더니. 동상 아래에는 누군가 두고 간 붉은 달리아 꽃다발이 햇빛 아래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곳은 김춘수 시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이 된 그 광장이다. 구 소련군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위하던 대학생, 시민들이 난사된 소련군의 총탄에 켜켜이 쓰러져간 곳.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시인은 그렇게 처연하게 노래했었지. 생각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인간의 역사가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거의 그렇다는 것이 가혹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하릴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고 있었다.

“굿바이! 바이!”

국회의사당 맞은편 헝가리 민속 박물관의 모습.
한 군인이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크게 인사를 건넨다. 아까, 입장을 못한다고 말해주던 그 군인이었다. 그 다정하고 경쾌한 톤에, 뜻밖의 인사에 당황한 나는 우물쭈물하다 제대로 인사를 받아주지도 못했다. 지금 그 지나간 혁명의 자리는 붉은 장미와 튤립과 팬지로 분분했다. 꽃들은 그날의 피처럼 선연하지만, 혁명은 어느새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웃고 농담을 건네고 아이들과 강가를 산책한다. 그리고 갈맷빛 활엽수 아래에서 먼 이국의 동양여자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굿바이. 나는 그에게 돌려주지 못한 인사를 손에 그러쥔 채 성 이스트반 성당으로 향했다.

2. 불멸의 손을 보다, 성 이스트반 대성당

자유 광장을 지나 정갈한 어느 도로에 들어서자 그 끝에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인 성 이스트반 성당이 보였다. 햇빛에 눈이 부셨기 때문일까. 그것은 금모래빛, 혹은 탱자빛으로 타오르며 그 거리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성당에는 헝가리의 성인이자 최초의 국왕, 이스트반의 오른 손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손은 그가 죽은 후 50년이 지나서 썩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근 국가들에 빼앗겨 이 성스러운 손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거의 칠백 년 동안 떠돌다가 1771년이 되어서야 헝가리인들의 눈물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헝가리인들은 이 성스러운 손이 소련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믿고, 이 성당을 헝가리의 심장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헝가리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거리에서 파프리카 가루가 든 헝가리 음식을 파는 요리사.
동전을 넣자 불이 켜지고 황금으로 치장한 유리 궤 속에 주먹을 쥔 마른 손이 드러났다. 인간이었으나 성자가 된, 죽었으나 썩지 않는. 불멸의 손, 불멸의 믿음.

언젠가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눈앞에서 하느님을 만나거나, 기적을 보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생각이 들까. 그것은 수천 개의 생각들이 번개처럼 온몸을 통과해서 오히려 입도 달싹거릴 수 없는, 환한 진공의 시간이었다. 헝가리의 썩지 않는 믿음이여, 영원하길. 나는 내 안에도 불이 하나 켜지기를 기도하면서 촛불 하나를 성당 안에 켜두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거리의 한 카페에 앉아 편지를 썼다. 여기는 혁명의 땅, 성자의 땅, 축복받은 마자르족의 고향이라고 썼다. 먼 곳에 있는 당신도 당신의 땅을 사랑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불멸하는 것들을 잊지 말라고,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평온케 하길 바란다고도 썼다. 민트 잎이 들어간 차를 마셨고, 삶과 죽음, 전쟁과 혁명,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거리가 어둑해지는 것도 몰랐다. 

강변, 환하게 밝혀진 세체니 다리 아래는 연인들이 가득하다.
3. 그리고 한밤의 영웅 광장

다정한 페스트의 저녁은 내게 너무 빨리 왔다. 허기가 져서 우선 여행 책자에 나온 식당을 지하철을 갈아타고 찾아 갔는데, 이날은 어찌나 운이 없는지! 마침 찾아간 그 식당도 인근 도로의 공사로 문을 닫은 것이다.

우울한 얼굴로 지하철역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근처에 아가씨 몇 명이 무슨 캠페인을 하는지 광고판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은 붉은 하트가 그려진 큰 판자를 들고 있었다. 마침 지나치는 나를 키 큰 아가씨가 부르더니 “프리 허그!” 하고 외쳐댔다. 짤막한 망설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마주보다가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오래전 헤어진 자매처럼 그렇게. 말이 필요 없는 공감과 위로의 시간, 온기가 손끝까지 퍼지는 듯했다. 굿바이! 낮에는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인사를 그녀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근처의 식당에서 구야시 스프와 빵, 매운 소시지로 든든한 헝가리식 저녁 식사를 했고, 다시 기운을 내 밤늦게 영웅 광장에 갈 수 있었다. 환한 가로등과 조명이 비추는 헝가리 건국 시조들과 왕들의 기마상은 중앙에 우뚝 솟은 천사 가브리엘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 비장하고도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영혼과 정령들의 세계를 믿는다면 이 광장이 의미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영웅광장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다시 그 대리석 바닥에 앉아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동차들의 행렬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도시, 애달픈 도시, 먼 곳에서 나를 끊임없이 갈증 나게 할 도시. 밤의 자동차들은 더 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나는 아쉬움 속에서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밤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자 시인

◆헝가리의 기념품

■토카이(Tocaj) : 헝가리 대표 와인으로 달콤하고 향이 좋다. 숫자는 당도를 의미. 1∼6 중 6이 가장 달다.

■우니쿰(Unicum) : 헝가리의 약초술로 선대왕들이 사랑하던 술이었다. 50여종의 허브를 달여 만든 것으로 건강에 좋고, 숙취를 예방하는 효과가 뛰어나므로 다른 술을 마시기 전에 마신다.

■이노레마 크림(Inno Rheuma Krem) : 기념품점마다 갖추고 있는 헝가리의 유명한 관절염, 근육통 연고. 의술이 발달한 헝가리에서 아프리카의 악마의 발톱이라는 약초 성분을 이용해 만든 천연 허브 연고로 효과가 좋다. 이왕이면 약국에서 구매할 것을 추천.

■핸드메이드 자수 : 헝가리의 자수 테이블보와 손뜨개 제품들은 동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제품들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지수 '충성!'
  • 지수 '충성!'
  • 유다인 ‘매력적인 미소’
  • 황우슬혜 '매력적인 미소'
  • 안유진 '아찔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