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출범 후 공약 후퇴에 실망… “관심도 없다”… 냉소적 외면 “그런 거 이미 다 잊었고 이제 관심도 없다.”
김종인(사진)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게서 답변 들을 생각 말라”며 답변을 피하고 피하다 내뱉은 말이다. 경제민주화를 핵심으로 박근혜노믹스(박근혜정부 경제정책)를 설계한 주인공의 발언인 만큼 그 함의가 가벼울 수 없다.
김 전 위원장의 서울 부암동 사무실을 찾은 것은 9일 오전 10시. 약속된 만남이었지만 김 전 위원장은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인터뷰는 안 한다. 차나 한잔 하고 가시라”고 말하곤 입을 닫았다. 경제양극화, 경제민주화, 박근혜노믹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등등 현안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지만 함구로 일관했다.
김 전 위원장은 대선 전 박근혜 대통령의 멘토였고,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으로 만들어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그런 그의 침묵과 외면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와 믿었던 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발언을 추적해보면 박 대통령에 대한 입장 변화가 극명하게 확인된다. 초반의 신뢰는 점차 사라지고 냉소적 시선이 그 자리를 메운다. 종국엔 ‘완전한 결별’의 냉기가 더해졌다.
대선 전 그들의 인연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김 전 위원장의 ‘러브콜’로 시작됐다. 김 전 위원장은 2011년 9월 말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선후보군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내가 먼저 보자고 했다”고 소개했다. 자신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구상을 실현할 적임자로 박 대통령을 낙점한 것이다. 이후 박근혜 캠프의 책사로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무기로 대선 승리에 기여했지만 온전한 신뢰는 거기까지였다.
친박근혜계 경제통 이한구 의원과 충돌하고, “대통령직인수위에 경제민주화 개념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던 그는 정권 출범 후 서서히 변해갔다. 3월 초만 해도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 이행을 의심하지 않더니 7월 말엔 “경제민주화는 더 이상 얘기 안 하려 한다”(7월 말 기자와의 통화)며 입을 닫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가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7월10일)고 말하면서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급속히 뒷걸음질쳤다.
김 전 위원장은 “내년 3월 독일로 떠나 몇 달 머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철학은 독일 유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복지를 해서 망한 나라는 없다”고 했고, “인간의 탐욕을 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한 성공적 경제모델”로 독일을 꼽은 적이 있다. 이날 그의 책상엔 ‘어떤 복지국가인가-한국형 복지국가의 모색’이란 책이 놓여 있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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