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혁신 멈추며 몰락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4년은 일본의 대표 기업인 소니가 첫 영업손실을 기록한 해다.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지나치게 방대한 사업을 벌인 데다가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1990년대부터 서서히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반도체, TV,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등 여러 전자기기 분야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1등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잘되는 사업을 유지하는 데만 주력할 뿐 첨단 소재와 기술의 등장, 소비자의 경향 변화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들이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된 1990년대 반도체와 LCD(액정디스플레이)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부족했고, 전통적인 수직통합형 사업모델을 고수하면서 산업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시장에서 잘 팔리는 제품보다는 자사 기술의 우위를 보여줄 수 있는 제품에 집착하거나 저가시장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애플이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하며 MP3플레이어 시장을 열었음에도 소니는 오랜 시간 워크맨과 미니디스크(MD) 플레이어에 집착했다. TV부문에서는 1990년대 후반 개발한 트리니트론 방식의 브라운관 TV에 안주해 평면 LCD TV 제조를 중지하고 새로운 브라운관 공장을 설립하는 악수를 두기도 했다. LCD의 원조인 샤프는 고립을 자초했다.
샤프는 한때 LCD 패널을 소니나 마쓰시타에 공급하길 거부했고, 이 때문에 소니는 LCD 패널 개발을 위해 삼성전자와 손을 잡아야 했다. 샤프는 2011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에 3760억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기업이 고전하는 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반대로 빠르게 성장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전자기업들이 연평균 4.3% 성장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22.5%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일본 기업들이 방만하게 사업을 벌인 것과 달리 한국 전자기업들은 특정 제품에 주력해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LCD·디지털TV·휴대전화 4대 주력 품목에서 현재 세계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집중 투자와 끊임없는 연구개발 전략에 힘입어 한국 기업은 1993년 이미 메모리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했고 2002년 LCD, 2006년엔 TV 분야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절치 부심 日· 신흥 강자 中, 매서운 추격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본과 신흥 경제대국인 중국 업체들이 매섭게 한국 업체를 추격 중이다. 시장의 흐름을 잘못 읽기는 했지만 일본의 기술력과 제품력, 브랜드력은 여전히 탄탄하다. 지난해 소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 CES에서 4K UHD(초고선명) 해상도를 지원하는 56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중국은 더욱 무서운 경쟁상대다. 국내 업체들은 중국과 한국의 TV 기술력이 1년여 격차밖에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보기술(IT) 시장의 핵으로 떠오른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현지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2년엔 레노버, 쿨패드, 화웨이, ZTE 등 중국 업체들이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량 2∼5위를 차지하며 총 36%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중국의 애플’로 불리기도 하는 스마트폰 제조업체 샤오미는 1년 새 스마트폰 판매량이 160%나 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 주요산업 현안 진단’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가 ‘세계경제 저성장, 원고·엔저로 인한 수출경쟁력 악화와 중국·일본의 협공, 차세대 기술 및 시장의 불확실성의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고 우려했다.
보고서는 “경쟁이 치열한 산업에서는 한 번 모멘텀을 상실하면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대응 방안으로는 ▲폭넓은 기술 개발을 위한 다양한 인력 구성과 도전적 시도를 용인하는 문화 ▲산업 판도를 바꿀 기술혁신 도전 ▲수입에 의존해온 고부가 소재·부품 분야 공략을 내놨다.
엄형준 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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