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의정부음악극축제에서 공연한 러시아의 시극 ‘넷 렛’에서 반복적으로 읊어졌던 옙두셴코의 시구이다. 이 시에서처럼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관계에 따라 맥락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모습들이 발휘될 뿐. ‘나’가 이렇게 다양한데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사회는 얼마나 다채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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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제현대무용제 개막작인 ‘하우스’는 억눌려 있던 본능이 깨어나는 모습을 관능적인 동작으로 표현했다. |
특히 현대의 실험적인 퍼포먼스들은 관객에게 주제를 강요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즉 관객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정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자나 배우뿐 아니라 관객 역시 작품의 의미생산자가 된다. 올해 국제현대무용축제(모다페)의 개막작인 ‘하우스’는 관객에 따라 내용을 해석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이스라엘 무용단 L-E-V는 아예 관객이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독려하는 의도로 프로그램에 작품의 주제나 의도에 대한 해설을 담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면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오롯이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을 따라가는 관극의 재미도 상당히 쏠쏠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공연에서 집단 속의 다양성에 흥미를 느꼈다. 언뜻 무용수들이 비슷한 동작을 공유하고 반복하는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놀랍도록 잘 훈련된 몸에서 나오는 춤의 질감이 각기 다르다. 또한 뮤지컬 안무가 밥 파시를 떠올리게도 하는 다소 기괴하면서도 관능적이고 경쾌한 동작들이 억눌린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앞서 소개한 ‘넷 렛’의 시구는 “당신은 내게 질문할 것이다. 대체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꼭 하나만이 진실이어야 하느냐고 반문해 본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가인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듯,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내가 만든 생각의 틀은 다른 이들에게, 특히 소외된 타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다양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이 낙관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지 않을까. 대중이 아닌 ‘다중’의 개념으로 공동체와 개인을 모두 품어 안을 때인 것 같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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