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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며] 민족화합·이산상봉 기여… 영원한 ‘레드 크로스맨’

입력 : 2017-02-05 21:33:44 수정 : 2017-02-05 23: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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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코리아 레드크로스(Red Cross)맨, 미스터 서’

4일 세상을 떠난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는 생전 이 말을 자랑스러워했다. 잠깐의 현실 정치 참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간을 사회운동과 남북 화해의 현장에서 보냈고, 그중 가장 긴 시간을 한적에서 보냈다.

1953년 한적에 몸담은 뒤 1982년 사무총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국제적십자운동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31세에 한적 청소년국장 부임 후 가장 먼저 청소년적십자(RCY)부터 만들어 청소년을 교육하고 유학보냈다. 고등학생이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이때 미국 연수를 갔다. 반 전 총장은 5일 오후 빈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고인과의 오랜 인연을 회상하며 눈물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4일 별세한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운데)가 2002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금강산 장전항에 도착해 걸어가고 있다(사진 왼쪽).
1974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에 참가했다.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이었음에도 “북한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직접 앰뷸런스를 타고 쓰러진 시민을 구하며 탱크로 가로막힌 길을 열었다. 그는 “내가 광주로 구호물품 세 트럭 싣고 앞장서서 차 몰고 가는데 탱크로 막았어요. 육군소령이 ‘못 갑니다’ 하는데 ‘가야 된다, 적십자는 이런 때에 활동하게 되어 있는 거니까 막지 마라’고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3년 취임한 흥사단 이사장 시절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졌다. 1980년대 말 KBS 사장을 거쳐 1990년대에는 각종 시민사회운동을 지도해 시민사회운동의 대부라는 칭호를 얻었다. 1970년대부터 여야, 진영에 상관없이 정치권 러브콜을 받던 그는 고민 끝에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에 취임했고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현장을 함께 했다.

서 전 총재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일원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5일 조문객이 서 전 총재 영정 앞에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의 일생을 사로잡은 것은 사상이었다. 1923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톨스토이와 간디를 좋아했던 10대의 서영훈은 훗날 도산 안창호와 함석헌, 유영모 선생의 글을 읽으며 스스로 사상가의 길을 갔다.

광복 직후 서울로 와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하고 김구, 장준하 선생 등 독립운동가 출신 지도자와 가깝게 지냈다. 종합교양지 ‘사상계’의 시초가 된 ‘사상’은 장준하 선생과 서 전 총재, 둘의 작품이었다.

그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사상, 종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토대로 인류와 한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공동선과 생명질서 사상을 철학적 지표로 제시했다. 모든 생명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를 존중할 것과 참되고 선한 인간성과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회복해 인류가 더불어 사는 삶을 일궈낼 것을 강조했다.

부인 어귀선씨와 사이에 아들 홍석·유석·경석, 딸 희경씨 등 3남1녀를 두고 있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빈소는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3호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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