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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사람은 줄고 일은 늘고…육아휴직은 딴세상 얘기"

입력 : 2017-02-13 18:21:42 수정 : 2017-02-13 21: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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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 겉도는 '일·가정 양립' 정책] 모성보호 외면하는 中企 / 사업체 작을수록 추가 고용 더 기피/ 업무 연속성 탓에 불가능한 곳 허다/ 유연근로제 도입률도 10곳 중 1곳뿐/ 임신부 시간외근로 금지 준수 26%/ 근로 단축제 운영 사업장 23% 불과/“노동시간 줄이는 근본 정책 나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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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한 광고제작업체에서 일하는 임모(39)씨는 최근 업무량이 급증했다. 얼마 전 회사 여직원이 출산휴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직원은 육아휴직까지 고려하고 있지만 회사는 대체인력 충원 계획이 없다. 여직원의 업무까지 떠안게 된 임씨는 당분간 ‘저녁이 없는 삶’을 각오해야 할 처지다. 여직원은 여직원대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출산휴가와 퇴직 사이에서 심한 압박을 받아야 했다. 임씨는 “동료 직원의 임신과 출산을 축하해 줘야 하는데, 사람은 줄고 일은 늘다 보니 서로가 미안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이 겉돌고 있다. 전체 근로자의 90%가량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에선 절반가량이 육아휴직으로 인한 업무공백을 남은 인력이 나눠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남성 육아휴직, 유연근로제, 가족돌봄휴직제 등 다양한 일·가정 양립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현실은 정책과 동떨어져 있다.

◆육아휴직 업무공백은 남은 인력끼리 해결

13일 한국여성정책원의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육아휴직에 따른 업무공백을 남은 인력이 메꾸고 있는 곳은 전체 사업체의 44.6%에 달했다. 이어 ‘계약직 대체인력을 추가로 고용’(34.1%), ‘새 정규직 인력을 채용’(7.9%), ‘일용직 인력 고용’(1.7%) 등의 순이었다. 사업업체 규모가 5∼9인인 회사의 경우 남은 인력이 육아휴직 업무를 부담하고 있다는 응답률이 47.3%에 달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도 41.9%였다. 업종별로는 도소매·음식숙박업과 건설업의 경우 ‘남은 인력끼리 해결’하는 비율이 각각 53.2%, 53.3%로 평균보다 높았다. ‘계약직 대체인력을 추가 고용’하는 방식은 사업·개인·공공서비스업(52.9%)과 전기·운수·통신·금융업(34.5%)에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기업도 육아휴직에 따른 직무연속성의 결여, 대체인력 구인난 등을 호소했다. 기업의 한 인사담당자는 “업무이해도, 연속성 등을 고려할 때 육아휴직으로 빈자리에 대체인력을 쓰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 보니 같은 일을 하던 부서 동료들이 역할을 나눠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일·가정 양립 정책인 유연근로제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차출퇴근제, 시간선택제 등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유연근로제 중 한 개라도 도입한 업체는 21.9%에 불과했다. 5∼9인 사업체의 경우에는 12%만 유연근로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출산전후 휴가 이후 별도의 신청 없이 육아휴직을 부여하는 ‘자동육아휴직제도’를 도입한 경우는 8.1%에 불과했다. 63.4%는 이 제도를 도입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외면당하는 모성보호제도

정부가 저출산대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모성보호제도 역시 현장에선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임신한 근로자의 시간외 근로를 금지하고 쉬운 종류의 근로로 전환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임신 중 시간외 근로 금지제도를 도입한 사업체는 51.4%에 불과했다. ‘임산부는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 및 휴일에는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조항도 유명무실했다. 임산부의 야간·휴일근로 제한 제도가 있다는 비율은 절반(46.9%)에도 미치지 못했다. 9인 이하 중소기업의 경우는 그 비율이 26.4%에 그쳤다.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의 운영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014년 9월부터 유·사산 위험이 높은 임신 12주 이내와 임신 36주 이후에는 1일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시행 초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하다가 지난해 3월부터 1인 이상 전 사업장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5∼9인 사업체 가운데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도입한 비율은 22.8%에 머물렀다. 모성보호제도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업체도 많았다. 5∼9인 사업체의 39.4%는 ‘임신 중 쉬운 종류의 근로로 전환’ 규정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유해·위험 직종 근무 금지 규정에 대해서도 34.1%가 “그런 제도가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일·가정 양립과 모성보호제 확산을 위해 매년 수천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저출산 극복 관련 예산의 3.5%인 7575억원이 일·가정 양립 문화정책을 위해 투입됐다. 하지만 이 예산의 90%가량이 고용보험기금에서 지급하는 육아휴직급여로 쓰였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5인 이하 기업까지 포함할 경우 실태조사 결과는 더욱 낮게 나올 것”이라며 “근본적으로는 노동시간을 줄여 자녀 양육이 필요한 시간을 제공하는 강력한 정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안용성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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