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차! 이럴수가. 여행 일정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선택했다. 태풍이 오는데 제주도라니. 여행의 기본은 일기예보 체크인데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화가 치민다. 서울은 맑았지만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주룩주룩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제주 날씨는 변화무쌍하지 않는가. 3일 여행하면 보통 하루 정도는 비가 온다니 반대로 하루쯤은 날이 개일 테지. 그러니 비 온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 없다.

비 올때 제대로 모습을 보여주는 여행지는 없을까. 공항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손품을 팔다보니 눈에 번쩍 띄는 사진 한장이 툭 튀어 나온다. 제주절물자연휴양림. 물안개가 끼면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비가 오는 날씨에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바로 여기다! 무릎을 탁 치며 빗속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본다.

#비가 와서 더 신비로운 삼나무 숲
서둘러 렌트카를 빌려 제주시 명림로의 제주절물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행여나 하는 기대는 통하지 않는다. 산길로 접어들수록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바람이 더 거세게 몰아치니 말이다. 이러다 사고는 나지 않을까 덜컥 겁이난다. 거북이처럼 차를 몰아 40여분만에 절물휴양림에 도착했다. 이런 날씨에 누가 이곳을 찾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주차장은 절반가량 차들로 채워져 있고 우비를 챙겨 입은 관갱객들이 종종 걸음으로 오간다. 비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매표소에서 일회용 우비를 구입해 휴양림으로 들어섰다. 매표소 직원이 뒷통수에 대고 한마디 툭 던진다. 비가 와서 미끄럽고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나무 데크로 만든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란다.
고요하다.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서인지 요란하던 비바람은 숲속에서 힘을 잃고 추적추적 내리는 이슬비로 바뀐다. 충분히 여유롭게 걸을만하다. 태풍의 눈 처럼 고요한 삼나무 숲은 비가 내리니 몹시 운치있다. 물에 젖은 몸통의 갈색과 잎의 녹색이 더 선명하게 짙어졌다. 잎을 타고 또르륵 흘러 내리는 물방울은 작은 타악기처럼 숲 바닥에 “토닥 토닥” 떨어지며 내 등을 쓰다듬는다.

숲속 공기를 폐속 깊숙하게 들이 마시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드디어 사진 속 풍경을 마주한다. 비가 만들어낸 물안개가 나무 기둥 사이로 피어 오르자 마치 드라이 아이스로 연출한 영화의 한 장면같다. 삼나무가 보일 듯 말듯, 비밀의 정원에 선듯한 느낌을 주며 저 안개 끝으로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요정들이 걸어나올 것만 같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오면 순식간에 안개는 사라지니 잠시 꿈을 꾼 듯 어지럽다.
울창한 숲의 대부분은 수령 30년이 넘은 삼나무로 소나무, 산뽕나무도 섞여있고 면적은 300ha에 달한다. 노루도 살고 있다니 운이 좋으면 영험한 기운을 지녔을 것 같은 노루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절물휴양림은 기생화산인 절물오름 북쪽기슭을 끼고 조성돼 있다.

큰대나오름과 족은대나오름을 거니리고 있는데 등산로를 따라 오름을 오르다보면 옆구리에 말발굽 모양의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절물오름은 해발 697m로 정상까지는 여유있게 걸어도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왕복할 수 있다.
절물이라는 이름은 약효가 뛰어난 물이 이곳에서 샘솟는다고 해서 유래됐다. 신경통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해지며 가뭄때도 마르지 않아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했다. 실제 절물오름 정상에 오르는 길에 작은 절 약수암이 있고 그 동쪽에 절물이라 불리는 약수터가 있는데 큰대나오름 기슭에서 자연 용출돼 나오는 약수다. 제주시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수질조사를 하고 있다니 안심하고 실컷 마셔본다.
날씨가 좋을때 절물오름 전망대에 오르면 한라산과 여러 오름,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진 제주바다를 즐길 수 있다. 절물휴양림에는 야영장, 체력단련시설, 어린이놀이터, 야외교실, 자연관찰원 등의 교육시설도 마련돼 가족 나들이에도 좋다. 여유가 있다면 인근의 노루생태관찰원, 교래자연휴양림, 돌문화공원 등과 묶어서 둘러보자.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숲 곶자왈
밤사이 태풍이 빠르게 지나갔는지 아침이 찾아오자 다행히 비바람이 멈췄다. 아직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지만 저 멀리 파란 하늘도 조금씩 보이니 한낮이면 구름 사이로 작은 햇살도 내릴 것 같다. 이런 날씨에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화순곶자왈 생태탐방숲길이다.
곶자왈은 제주에 있는 독특한 화산 지형을 일컫는 제주어. 화산활동으로 생긴 바윗덩어리들이 쪼개지면서 요철 지형의 숲을 만들었는데 전세계에서 제주도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구간마다 미세기후가 존재해 하나의 숲에서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까지 다양한 기후대의 식물이 공존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습기가 많아 바닥이 축축하며 모기 등 벌레들이 있으니 반드시 긴바지와 긴소매옷, 트래킹화를 챙겨 가야한다. 입구에는 몸에 뿌리는 모기약도 준비돼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자.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곶은 숲을, 자왈은 나무와 덩굴이 마구 엉킨 덤블을 뜻하는데 실제 층층이 쌓인 용암과 생소한 식물이 한데 뒤엉켜 인간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것 같은 태고의 숲을 이뤘다. 숲 한가운데 들어섰다. 울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며 아직 물기를 머금은 덩굴을 비추니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등장한 숲을 보는 듯 영롱하면서 신비롭다. 화순곶자왈은 모두 9㎞에 달하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식물 50여종이 서식하고 있다.
탐방로는 세 코스로 이뤄졌는데 기본코스의 경우 비교적 산책로가 잘 조성돼 보통걸음으로 30~4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곶자왈 주변 초원에는 방목해 기르는 소나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좋은 사진도 남길 수 있다. 곶자왈 주변에 조성된 제주신화월드리조트는 곶자왈의 완벽한 보존을 위해 100억원을 지원할 정도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비가 꼭 와야만 본색을 드러내는 곳도 있다. 서귀포시 강정동의 엉또폭포. 월산마을에서 악근천을 따라 500여m 올라가면 높이 50m의 폭포를 만나는데 100㎖ 가량의 비가 한바탕 쏟아져야만 폭포의 시워한 물줄기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주변의 기암절벽과 계곡의 넓은 지역에 형성된 사시사철 푸른 천연 난대림과 어우러지며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걷다
오후가 되니 먹구름도 걷히고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까지 피어나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다행이다. 요즘 ‘인생샷’ 명소로 소문난 송악산 둘레길에서 남처럼 멋진 사진 한장 건지고 싶었으니 말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이중분화구를 지닌 화산지형이다. 1차 폭발로 형성된 제1분화구 안에 2차 폭발이 일어나면서 2개의 분화구가 만들어졌다.
산방산 남쪽 바닷가에 우뚝 솟은 송악산의 둘레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절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하늘 바다와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며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 마라도까지 감상할 수 있다. 둘레길을 오르며 흘린 땀은 시원한 바람이 날려주니 두 팔을 활짝 벌려 제주의 삼다(三多)중 하나인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해보자.

사실 송악산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제주 사람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이곳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는데 제주 사람들을 동원해 뚫어 놓은 인공동굴 15개가 송악산의 해안가 절벽에 남아있다. 예전에는 소나무, 동백, 후박, 느릅나무 등이 무성했는데 일본군이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불태우면서 지금은 풀만 무성한 초원으로 변했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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