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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남자도 있어… ‘성평등’ 이젠 여성만의 외침 아냐 [이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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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8-08 10:30:00 수정 : 2021-08-08 1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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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 거부하는 남성들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 프레임 갇혀
이남자들 “역차별 당하고 있다” 인식
윤리·도덕적 잣대로 사용해선 안돼

男도 피해자라는 시각은 ‘불행 배틀’
‘○○다움’ 남녀 모두 벗어야 할 굴레
교육·문화 등 총체적 변화 선행돼야

정치권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젠더 갈등’ 이슈가 끊이지 않고 있다.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청년 남성을 중심으로 “남자라고 혜택받은 것도 없는데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런 목소리는 급기야 ‘페미니즘은 남혐(남성 혐오)’이라는 프레임으로 이어졌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고 성평등을 이루자는 페미니즘을 여성 우월주의로 오해하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이다.

 

6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발표문에 따르면 만 19∼59세 남성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연령이 낮을수록 컸다. 구체적으로 성차별 반대 운동을 지지하는 비율은 전체 남성에서 미투운동 63.1%, 낙태죄 폐지운동 60.9% 수준이었지만, 20대 남성으로 한정하면 이 비율이 각각 44.9%와 46.9%로 줄었다. 조사 대상 연령대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하지만 성평등은 비단 여성만의 외침이 아니다. 남성 역시 어릴 때부터 사회로부터 ‘남성다움’을 강요당한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는 자신의 저서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에서 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의 틀을 ‘맨 박스(MAN BOX)’로 규정하고 이를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도 성차별의 피해자인 만큼 성역할에 대한 억압에서 탈피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일보는 이런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자처하는 젊은 남성 4명에게 우리 사회의 성평등에 대해 물었다. 이들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굴레를 벗자는 페미니즘은 결국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3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방담에는 초등학교 교사 이우혁(30)씨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 이한(30)씨, 녹색당 기후정의위원회 위원장 이은호(32)씨, 변호사 김한울(33·가명)씨가 참여했다.

 

―성장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을 학습한 경험이 있나.

 

△이은호=학교 다니면서 또래 사이에서 내재화한 거 같다. 눈물이 많았지만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남자는 참거나 감정을 안 드러내는 게 미덕이라고 해서 힘들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이한=남성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고 생각하지만 ‘잘하기 위해’ 노력한 게 많다. 수영을 못해 겁이 났지만 일부러 다이빙을 한다든지 해외 축구를 보는 척을 하기도 했다.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나 모습들이 나와 맞지 않아도 ‘눈치껏’ 따라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또래집단에서 여성이나 여성스럽다고 하는 것을 배제하는 문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다른 대안을 찾아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이우혁=초등학생 때 여학생이랑 싸우다가 운 적 있는데 주변 남자애들이 “어떻게 여자랑 싸워서 지냐, 남자가 우냐”며 놀렸다. ‘강한 남성’이 ‘약한 여성’을 지켜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도 불만이 많았다.

지난 3일 진행된 온라인 방담에서 이한 활동가(가운데)를 비롯한 참여자들이 ‘남자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한울=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때 한국으로 돌아오니 남자 친구들이 왜 여자애들이랑 놀려고 하느냐고 하더라. 남자는 남자끼리만 놀아야 하고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거나 거리를 둬야 하는 게 당연했다. 외국과는 달랐던 이런 분위기에 크게 당혹스러웠다.

 

―남성에게 특정 역할을 부여하는 가부장제에서 남성 역시 피해자라고 보는지.

 

△이한=‘남성도 피해자’라 하는 것은 남녀 사이 ‘불행 배틀’이 될 수도 있어서 말하기 조심스럽다. 다만 가부장제에서 남성에게 ‘알파 메일’(alpha male·우월한 수컷)의 모습을 강요하고, 더 많은 노동 부담을 진다는 등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제가 남녀를 모두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 구조를 바꾸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이은호=어떤 면에서는 피해자다. 남성들은 과거 권력을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무너졌다. 그런데도 감정을 숨기라고 배웠고, 관계를 맺거나 의지하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 권력에 대한 갈망은 있는 상태에서 경쟁에서 여성에게 밀리니 폭력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여성과 동등한 피해자라 할 수는 없다. 다양한 남성상이 생겼지만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이 분명히 혜택을 보고 차별의 수혜자로서 남아있다.

 

△김한울=과거에는 가정을 부양하는 것이 전통적인 남성상이었고 큰 노력을 안 해도 획득할 수 있는 목표였다. 요즘은 그것만으로는 인정을 못 받는다. 사회가 원하는 남성상이 좀 더 ‘젠틀한’ 것으로 변했지만, 이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남성들도 힘들고 피해를 겪을 수 있지만 가부장제 자체가 남성 중심의 일련의 인식 체계나 사고라고 볼 때 그 구조 안에서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 남성이 느끼는 불합리함은 여성이 겪는 것과 같은 층위가 아니다.

△이우혁=남성도 피해자라 하는 것이 주변 남성을 설득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우리도 이 제도의 피해자니 남자의 부담이 줄어들려면 여성의 권익이 올라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젊은 남성 사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이은호=발 딛고 설 곳이 무너졌다. 기존의 가부장적인 남성상이 될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 경쟁으로 도태되는 상황에서 불안감이나 조바심이 커져 폭력이나 배제로 나타나고 있다.

 

△김한울=이전 세대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많았다. 다만 ‘트리거’(반응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는 지점이 달라졌다고 본다. 공정성이 깨졌다고 생각하면 폭발적인 분노로 이어진다.

 

△이한=페미니즘은 기존의 인식이나 습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 전환이기 때문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고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백래시’(반발)가 심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결국 교육이나 사회·문화적으로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역할이 있다면.

 

△이우혁=남자 페미니스트만이 가진 장점이 있다. 남성 사회의 문제점을 내부고발하고 균열을 내는 것은 남성만이 할 수 있다. 여성 문제에서 ‘당사자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남성 페미니스트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주변에 딸이 있는 남성에게 ‘네가 하는 행동을 딸한테 한다고 생각해보라’라고 하면 잘 이해한다. 누구든 가족이나 친구, 동료 중에 반드시 여자는 있다.

 

△이한=남성 페미니스트란 표현 자체가 성별 이분법을 강화할 수 있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페미니즘을 배웠다고 손쉽게 타자화해서 비난할 것은 아니다. 다만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남성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할까, 내가 어떻게 다가가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이은호=페미니즘을 윤리나 도덕적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다른 남성에게 가부장제보다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함께 가부장제에 대항해 싸워나갈 수 있다고 본다. 더 많은 사람이 이편에 함께 설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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