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 “철썩” 바람의 언덕 부남코지 오르니 시름도 싸악∼/야트막한 언덕길 쉬엄쉬엄 걷기 좋아/바다쪽 산방산 ·형제섬·한라산 정상 비경/일제때 만든 진지동굴 아픈 역사 간직
깎아지른 거대한 절벽을 따라 차곡차곡 쌓인 가로 줄무늬. 낭떠러지 위로 이어진 산책로와 절벽을 때리는 거친 파도. 그리고 절벽 위로 봉긋 솟아오른 분화구까지. 신이 거대한 자연을 캔버스 삼아 한껏 솜씨를 발휘했나 보다. 제주 송악산 둘레길 전망대에 서니 자연이 빚은 장엄한 풍경에 사람은 한없이 작아진다.
■올레길 10코스에서 만나는 송악산 둘레길
봄바람 살랑살랑 불고 햇살은 따사로우니 걷기 참 좋은 계절이다. 제주에는 26코스, 425㎞에 달하는 많은 올레길이 있지만 서귀포시 안덕면과 대정읍에 펼쳐진 10코스는 오로지 걸어야만 볼 수 있는 해안경관들이 펼쳐져 걷기 여행자들의 ‘로망’으로 꼽힌다. 총 길이는 15.6㎞로 5∼6시간 정도 걸리지만 난이도는 중급이라 초보자들도 쉬엄쉬엄 걸으며 제주의 봄을 즐기기 좋다.
산방산과 오름군단, 비단처럼 펼쳐진 한라산의 비경, 마라도, 가파도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는 10코스는 검은 모래 해변이 펼쳐진 안덕면 화순금모래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썩은다리 전망대∼황우치해안∼산방연대∼사계포구∼송악산주차장∼송악산전망대∼섯알오름∼하모해수욕장을 지나 대정읍 하모체육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런 올레길 10코스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단연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둘레길이다. 여유가 있다면 10코스 완주로 올레길 투어의 스탬프를 하나 얻을 수 있지만 근처에 주차장이 있어 바로 송악산 둘레길만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둘레길 입구에는 해녀와 물 깃는 여인, 그 사이에서 돌하르방이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리는 익살스러운 미소로 여행자를 맞는다.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작은 언덕을 넘자 오른쪽에 펼쳐진 초원 위로 불룩 솟은 송악산 정상인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이중 분화구로 1차 폭발로 형성된 제1분화구 안에 2차 폭발이 일어나 2개의 분화구가 존재하는 독특한 화산 지형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송악산 정상부가 훼손됐고 이에 지역주민, 환경단체, 오름 전문가 등의 의견에 따라 생태계 복원을 위해 2015년 8월부터 올해 7월 말까지 정상 일부 탐방로 출입을 제한하는 자연휴식년제가 시행 중이다. 산이라지만 해발고도 104m로 낮은 언덕 수준이어서 개방된 산책로를 따라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분화구 아래 넓은 들판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의 풍경이 그림 같다.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라산과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독특한 모습의 산방산, 굽이굽이 이어지는 올레길 10코스의 사계포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산방산 오른쪽 바다에 떠 있는 형제섬과 그 앞으로 지나는 여객선까지. 왜 이곳을 올레길 10코스의 절정이라 부르는지 잘 알겠다. 오전은 역광이라 그림 같은 산방산뷰를 맑고 깨끗하게 제대로 보려면 오후에 찾는 것이 좋다. 사이좋은 형제처럼 서로 나란히 바라보는 2개의 섬은 썰물 때는 3∼8개까지로도 보인단다.
산책로는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중간에 작은 전망대가 등장하는데 이곳에서 송악산 둘레길의 핵심인 부남코지 풍경이 가장 멋지게 한눈에 들어온다. 억겁의 세월 동안 화산활동과 파도, 바람이 만들어낸 장엄한 절벽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코지’는 바다에 돌출된 부분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고 ‘부남’은 바람이 많이 분다는 뜻. 바람의 언덕에 올라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이름처럼 강한 제주 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며 가슴 깊은 곳에 쌓인 이름 모를 티끌까지 모두 가져가 버리니 방금 샤워를 마친 듯 개운하다. 부남코지를 거쳐 전망대 3개를 모두 도는 코스는 2.8㎞로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리지만 핵심인 부남코지까지만 다녀오려면 편도 약 1㎞ 거리여서 20분이면 충분하다. 전망대 3곳을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적한 소나무숲으로 조성돼 조용히 머리 식히며 걷기 좋다.
■송악산에서 만나는 ‘다크 투어리즘’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송악산 둘레길은 ‘다크 투어리즘’ 코스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인들이 과거에 전쟁·학살이 발생한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발생했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송악산에도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바로 일제 진지동굴이다. 송악산 능선과 해안에는 일제강렴기이던 1943∼1945년 만들어진 크고 작은 진지동굴 60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실제 송악산 둘레길 초입의 해안 절벽에는 커다란 동굴 여러 개가 또렷하게 보이는데 이런 인공동굴이 해안절벽에만 15개에 달한다. 너비 3∼4m, 길이 20m에 달하는 동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 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수세에 몰리자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았고, 제주도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진지동굴을 팠다.
특히 송악산 섯알오름 쪽의 고사포 동굴진지는 군수 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만들었다. 여러 곳에서 파 들어간 동굴진지는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니 일제가 송악산을 만신창이로 만든 셈이다. 뿐만 아니다. 송악산 둘레길에는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지하벙커, 이교동 군사시설, 모슬봉 군사시설 등이 남아있다. 80만평에 달했던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으로 중일전쟁 때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구 훼손했다니. 여행자들은 둘레길에서 마주치는 일제의 만행에 할 말을 잃는다. 일제는 송악산 숲도 모두 훼손했다. 소나무, 동백, 후박, 느릅나무 등이 무성하던 곳을 군사기지로 만들면서 모두 불태웠다. 말들을 방목하는 초원은 이런 만행의 흔적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다시 풀과 나무가 자라 송악산의 아름다움이 일부나마 회복됐으니 말이다.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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