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분노, 절망이 72년 전 한반도를 가득 채웠다. 1950년 6월 25일, 깊은 새벽을 찢고 울려 퍼진 포성에 사람들은 놀라 피난길에 나섰다. 가족을 남겨두고 전선으로 떠난 장병 중 상당수는 사랑하는 이들과 재회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72년 전 T34 전차를 앞세워 대대적인 침공에 나섰던 6·25 전쟁은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3년 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 전쟁 제72주년을 맞았지만 한반도는 종전 대신 ‘휴전’과 ‘장기간 분단 및 대치’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군사적 대치 현장으로 남아있다.
정전 이후 북한은 군사력을 늘리며 무력도발을 감행하는 등 ‘남한 흔들기’에 나섰다. 한국도 군비 확충에 나서면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통해 북한 위협을 저지했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북한은 핵과 미사일 위협을 고도화하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면서 대치 국면을 한층 격화시킬 위험이 있다.
◆동맹과 자주국방 함께 추구했던 한국
한미 동맹과 자주국방. 70여년 동안 숱한 논란 속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가안보의 두 기둥은 6·25 전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침략을 물리쳤다. 하지만 국민들이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와 헌신이 없다면, 외국군의 지원은 소용이 없다. 정부와 군, 국민의 의지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빠르게 남하하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작전지휘 일원화와 효율적인 전쟁지도를 위해 미국에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이양한다.
휴전 직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치, 외교 분야에 앞서 군사동맹 체제가 양국 관계의 중심에 자리잡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미 관계가 70여년 동안 정치적 부침을 거듭했음에도 근본적인 동요가 없었던 것은 한국군과 미군을 이어주는 군사동맹 체제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관계는 1994년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이양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다만 2014년 ‘조건에 기초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추진되면서부터는 미국 측에 기울어졌던 한미 군사동맹 체제의 무게 중심은 균형을 이루게 될 전망이다.
전작권 전환에 대해서는 노무현정부 시절부터 국내에서 찬반 논란이 거듭됐다. 국가적 위신 차원에서 조기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시기상조’를 지적하는 반론이 부딪혀왔다.
하지만 전작권 전환은 시점의 문제일 뿐, 전환 자체는 막을 수 없다. 한반도 작전을 주도할 한국군의 역량 강화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힘으로 조국을 지키자’는 자주국방 노선은 6·25 전쟁 당시부터 진행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독자적인 무기 개발을 위한 노력이 지속됐다.
1951년 해군은 비행이 불가능한 미군항공기를 수상항공기로 개조한 해취호를, 1953년 공군이 2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 부활호를 제작해 일선에서 사용했다.
1974년부터 20여년 동안 진행된 율곡사업은 한국군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육군은 전차와 장갑차, 소총, 곡사포 등 기본적인 전력을 확충했다. 해군은 호위함과 초계함을 확보했으며, 공군은 전투기와 방공무기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한국군은 북한보다 열세였던 군사력을 역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자극받은 북한은 병력 규모를 대폭 늘리고, 구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신무기를 도입했다. 하지만 냉전 붕괴로 인한 ‘고난의 행군’으로 재래식 군사력 격차는 더욱 커졌다.
◆핵 앞세운 무력도발 위험 높아져
한국군의 전력증강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한국군 내에서는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에 자신감을 갖는 기류가 강해지는 모양새다.
문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다. 북한은 6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통해 핵무력을 키웠다. 상징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를 실전배치하는데 한 발짝 다가선 상태다.
남은 것은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운용가능한 전력으로 핵무기를 재편하는 것이다.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최근 제7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동향이 주목되는 이유다.
7차 핵실험을 통해 크기를 줄이고 위력을 강화한 핵탄두를 만들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탑재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KN-23을 비롯한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함께 쓸 수 있는 전술핵을 만들 수도 있다.
정밀도와 요격회피 능력이 스커드보다 높아진 KN-23과 초대형방사포에 전술핵이 추가되면, 한반도 유사시 북한의 전쟁수행능력은 기존보다 훨씬 강해진다.
실전운용능력을 확보해 북한이 핵과 미사일 전력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충하면, 한반도 정세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
자신도 핵을 가졌으므로 한미가 전면전을 감행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인식 아래 북한이 도발과 충돌을 쉽게 생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핵개발에 성공한 인도와 파키스탄은 국경에서 무력충돌을 여러 차례 벌였다. 이스라엘도 시리아와 레바논 등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실시한 바 있다. 핵무기 개발로 전면전 위험은 줄어들지만 국지도발이나 충돌, 갈등은 증가하는 셈이다.
북한은 올해 들어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ICBM, 극초음속미사일 등을 총동원해 무력시위에 나서고 있다. 무력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는 상시적인 긴장감이 조성됐다.
그나마 북한이 휴전선과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무력충돌 방지를 위해 2017년 합의한 9·19 군사합의를 표면적이나마 지키고 있어 국지도발이나 전술적 차원의 무력시위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언제까지 9·19 군사합의를 준수할지는 불확실하다. 북한은 지금까지 남북 합의를 여러 차례 깬 전례가 있다. 군 소식통은 “올해 초 서부전선 일대에서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있었다”며 “9·19 군사합의 위반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휴전선 일대에서의 국지도발과 무력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던 2010년대 중반의 한반도 정세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군사적 대치 국면이 한층 격화될 위험도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1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작전계획 수정과 편제 개편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남측 동해안을 묘사한 작전지도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남 위협을 극대화할 작전계획 수정안에 미사일과 전술핵이 포함되면, 남한을 향한 북한의 ‘칼’은 더욱 예리해진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한국이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북한 핵무기의 무게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며 “미국의 확장억제 약속에만 의존해 남북 간 힘의 균형 회복을 포기한다면, 한국 국민은 재래식 무기 개발에 계속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하면서도 안보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같은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남북 대치를 완화할 수 있는 모멘텀은 눈에 띄지 않는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대화 재개는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대화를 통한 긴장 완화가 필요하지만, 북한은 대화 대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윤석열정부를 압박하고자 7차 핵실험을 포함한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2년이 되는 오늘, 이같은 대치 국면을 끝낼 방법이 있을까. 북한이 핵을 폐기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반전시킬 모멘텀 확보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어떤 형태로든 반전의 키를 얻지 못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군사적 대치 국면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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