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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vs AI 번역 대결… “사람이 풀어쓴 글이 더 흥미로워” [뉴스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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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0-20 23:00:00 수정 : 2024-10-20 22: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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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로 블라인드 테스트

영문판과 딥엘·챗GPT 번역 문장
전문 번역가·영어 원어민 등 평가
‘딥엘’ 영어 갓 배운 사람 작문 지적
‘챗GPT’ 문법적 오류 없지만 딱딱
인간 번역 땐 ‘의역·오역’ 우려도

업계, AI ‘초벌번역’ 통해 보수 낮춰
전문가 “비용 줄이려는 꼼수” 지적
“AI번역·사람 번역 분야 분리될 것”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등장인물인 남편이 주인공의 성격을 표현한 문장이다. 이를 인공지능(AI)과 번역가가 각각 영어로 옮겼다. 이 중 어떤 것이 사람이 쓴 문장일까.

 

①나는 그녀가 별다른 결점도 없고, 별다른 매력도 없어(have no particular drawbacks, just as she had no particular charms) 보였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 나는 그녀의 어떠한 신선함도, 재치도, 세련미도 없는 평범한 성격이 편안하게 느껴졌다(was comfortable with her plain personality).

 

②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처럼(just as she had no particular charm) 별다른 단점도 없어 보였기(also seemed to have no special drawbacks)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 신선함도, 재치도, 세련미도 없는 그녀의 특별할 것 없는(unremarkable)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was comfortable for me).

 

③그러나 특별한 끌림이 없었던 것처럼 별다른 결점도 없었기에(nor did any particular drawbacks present themselves) 우리 둘이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녀의 소극적인(passive) 성격에선 신선함도, 매력도, 특별히 세련된 무언가도 찾을 수 없었고(detect neither freshness nor charm), 그게 나와 딱 맞았다(suited me down to the ground).

 

세 번역 모두 한국어 원문의 뜻을 오류 없이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3번에만 유독 1·2번에선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옮긴이가 의도를 가지고 문장을 재조립하고, 표현을 수정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사람만 가능하다. 마지막이 실제 채식주의자를 영문으로 옮긴 데버라 스미스 번역가의 문장이다. 1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AI 번역 툴인 ‘딥엘(DeepL)’, 두 번째는 ‘챗GPT’(4o 미니)를 이용해 번역한 결과물이다.

 

20일 채식주의자의 여러 구절을 한영 문학 전문번역가, 5년차 비문학 번역가, 영어가 능통한 한국인, 한국어를 모르는 영어 원어민에게 보여준 뒤 평가를 부탁했다. 이 중 어떤 것이 AI, 어떤 것이 사람이 쓴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들은 전원 1∼2회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떤 글이 사람의 손을 탔는지 쉽게 구별해냈다. 예시로 든 문장 외에도 몇몇 문장을 제시했는데, 때에 따라선 번역가의 문장보다 AI가 쓴 문장이 “더 마음에 든다”는 답도 나왔다. 하지만 개인의 선호도와는 별개로, 모두 사람이 쓴 글이 소설로서 “더 흥미롭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평가자들은 공통적으로 딥엘의 결과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미국인 월터 C(36)씨는 “영어를 갓 배운 사람의 작문을 읽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가장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지만, 실제로 읽어 보면 어색할 정도로 ‘직역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챗GPT가 쓴 결과물은 1번에 비하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딱딱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한국문학 전문번역가인 정하연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부교수는 “1번과 2번 모두 의미와 구조엔 충실하나 원문의 리듬감, 화자의 톤이 반영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한국문학 전문번역가로, 김훈 작가 ‘칼의 노래’,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 등을 영어로 옮겼다.

 

스미스 번역가의 문장은 가장 유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어민인 월터씨, 일반인인 회사원 임원진(26)씨 모두 “가장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읽혔다”고 동의했다.

 

주인공이 감정적으로 독백하는 부분을 번역하자 AI와 인간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를 번역해 봤다. 딥엘은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를 ‘뭔가가 마음에 걸려(hanging over my head)’라고 번역했다. 5년차 비문학 번역가인 장모(27)씨는 “뒤에 이어지는 ‘명치에 덩어리로 막혀 있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오역”이라고 지적했다.

 

챗GPT는 평면적인 번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문 그대로 ‘어떤 고함(some wails)’이 ‘쌓여(piled up)’ 있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에 대해 정 교수는 “단어 선택과 표현은 매끄럽지만 화자의 톤은 반영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월터씨도 “감정적으로 와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스미스 번역가의 문장은 “격양된 톤을 영어로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어순 그리고 자음과 모음의 운율적 장치를 활용했다”고 정 교수는 짚었다. 스미스는 원문과는 다르게 울부짖음이 ‘층층이 쌓여 덩어리를 형성했다(threaded together layer upon layer, enmeshed)’고 표현했다. 다만 문장이 늘어지고 설명적으로 된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도 정 교수는 덧붙였다.

 

하지만 스미스의 재해석이 담긴 번역은 원문과 번역을 대조할 수 있었던 한국인 평가자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무난한 성격’을 ‘소극적인 성격’으로 표현한 첫 구절에 대한 평가가 특히 갈렸다. 정 교수는 “전략적으로 화자의 톤을 키운 번역인데, 원문에 비해 화자의 태도가 다르게 구현됐다”며 약간 비판적이었다. 장씨는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표현이 원문과 다소 다른데, 이런 표현 하나로 화자의 태도나 사상이 비치기 때문에 조금 위험한 선택 같다”고 말했다. 이 구절은 학계에서도 해외 독자의 이해를 고려한 ‘의역’인지, 작가의 의도를 곡해한 ‘오역’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반면 원문을 읽지 못한 월터씨는 “2번과 3번 모두 괜찮은 작문이지만, 소설책에서 봤을 때 무엇이 더 흥미롭냐고 묻는다면 분명 3번”이라고 말했다.

 

◆“오역 논란 있지만… 문학엔 정답 없어”

 

실제로 채식주의자의 번역은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 이후 오역 논란에 한동안 시달렸다. “소설 첫 장의 5.7%가 생략됐고 10.9%가 오역”이라는 주장이 국제 학술지에 인용돼 실리기도 했다. 한강이 직접 나서 “내 소설 고유의 톤을 포착하고 있다”고 스미스를 지지하고서야 논란은 일단락됐다.

 

오역 논란이 일 때마다 일각에선 “사람보다 AI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정 교수는 번역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문학 분야에선 더더욱 그렇다.

 

정 교수는 “문학에 정답이 없듯 번역에도 정답은 없다. 100점, 90점 이렇게 평가할 순 없다”고 말했다. 이어 “AI가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작품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고, 그건 좋은 문학 작품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번역가마다 그 작품에 대한 다른 번역을 내놓고, 독자가 다양한 번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오역은 개가 주인공을 문 죄로 보신탕이 된 경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스미스는 초판에서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를 ‘죽을 때까지 달리는 것이 더 부드러운(약한) 처벌’이라고 옮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선 스미스가 개 도살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번역이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해당 부분은 최근 출간본에는 ‘고기가 부드럽다’로 수정됐다.

 

정 교수는 “이런 단순 오역들은 발견하기만 하면 쉽고 빠르게 수정할 수 있다”며 그보다 문체와 시구, 운율 등이 정성적인 영역이 훨씬 더 번역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AI·인간 번역, 활용 영역 나뉠 것”

 

AI는 번역가의 생계를 위협한다. 번역이 생업인 장씨는 최근 AI 번역이 흔해지면서 번역가에게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커졌다고 말했다. 장씨는 주로 게임 스크립트나 웹툰 등을 번역한다. 그는 “AI로 ‘1차(초벌) 번역’은 해놨다며 단가를 낮춰 부르는 업체들이 정말 많아졌다. 대부분 50%를 깎고, 심한 곳은 10분의 1까지 깎는 경우도 봤다”고 토로했다.

 

장씨는 “원래도 좋은 번역에 합당한 값을 지급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는 환경에서 값싼 기계번역이 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AI에 의존해서 질 낮은 번역을 양산해내는 프리랜서들도 늘었다”며 “하지만 좋은 번역을 위해선 AI가 해 놨던 작업을 다시 읽고 뜯어고쳐야 한다는 걸 번역가들이라면 누구나 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도 최근 업계에서 AI 번역이 남용되는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정 교수는 “AI가 먼저 대량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사람이 이를 검토하는 방식은 양쪽의 단점만을 이용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라며 “시간도 돈도 버리는 방법일 뿐 아니라 노동 착취에 악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대학원에서도 번역을 의뢰하는 고객들에게 이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정 교수는 “검수 작업도 결국 머릿속에서 언어를 번역하며 읽어야 한다. AI를 핑계로 번역률을 깎는 것은 비용 절감을 하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AI가 번역 작업에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작업에 AI를 얼마나 활용하는지를 묻자 장씨는 “AI는 특정 표현이나 단어와 유사한 다른 선택지를 찾고 싶을 때 브레인스토밍용으로 쓴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AI는 번역 보조 도구로 유용하지만, 결국 번역자 실력이 좋아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AI가 번역하는 분야와 사람이 하는 분야가 분리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도식화된 내용의 번역, 빠르면서 정확한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번역은 AI가 점령할 것이고 그게 좋다고 본다”며 “번역 인력도 더 전문화·고급화되면서 앞으로 (문학과 같은 특정 분야에선) 번역에서 인간 고유의 기술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솔 기자 sol.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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