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민. 현대캐피탈 역사상 최고의 선수 한 명을 뽑으라면 첫 손에 꼽힐 선수다. 2010~2011시즌부터 V리그에서 뛰면서 통산 4809득점, 4122공격득점, 1484후위득점, 351서브득점 등 블로킹이나 수비 지표를 제외한 대부분 공격지표에서 구단 역대 기록을 모두 갖고 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주장을 맡았고, 2023년에 다시 한 번 주장을 맡는 등 그야말로 현대캐피탈의 산 역사이자 상징이었으며 이제는 최고참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맡고 있는 그다.
1986년생. 한달 뒤면 어느덧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되는 문성민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는 코트 위보다는 웜업존에서 대기하는 게 더 익숙해졌다. 현대캐피탈의 토종 에이스 자리는 띠 동갑내기 후배인 허수봉에게 물려준 지 꽤 됐고, 이제는 원포인트 서버나 원포인트 블로커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다.
3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2024~2025 V리그 대한항공과의 2라운드 맞대결에서도 문성민의 자리는 코트가 아닌 웜업존이었다.
지난 10월27일 대한항공과의 1라운드 맞대결에선 1,2세트를 내준 뒤 3~5세트를 따내며 승리를 거뒀던 현대캐피탈은 이날 경기는 양상이 달랐다. 1,2세트를 강서브의 힘으로 따냈다. 1세트엔 12-16으로 뒤진 상황에서 허수봉의 연속 서브로 대한항공 리시브를 크게 흔들며 17-16으로 역전에 성공한 뒤 따냈고, 2세트는 10-10에서 레오가 서브 득점 3개를 몰아치는 등 대한항공 리시브를 초토화시키면서 14-10으로 달아나며 따냈다.
현대캐피탈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대한항공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3세트부터 주전 세터를 한선수에서 유광우로 바꿨고, 아웃사이드 히터 한 자리도 1,2세트에 10~20%대의 공격성공률을 기록하던 정지석 대신 수비력이 뛰어난 곽승석으로 바꿨다. 미들 블로커 한 자리도 조재영 대신 진지위를 투입했다.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의 용병술은 적중했다. 유광우의 노련하고도 힘있는 경기운영에 3세트를 25-22로 따낸 대한항공은 4세트도 세트 막판 21-17로 앞서며 승부를 5세트로 끌고가는 듯 했다.
공격 성공률이 40% 후반대에서 50%대까지 나오는 남자부는 사이드 아웃이 잘 이뤄져 4점차를 뒤집기란 쉽지 않다. 17-21로 벌어지자 현대캐피탈 필립 블랑 감독은 4세트 들어 공격 성공률이 28.57%로 급전직하한 아포짓 신펑(중국)을 코트 밖으로 불러들이고, 왕년의 거포 문성민을 투입했다. 누가 봐도 신펑의 체력 안배를 위한, 5세트를 대비하는 교체로 보였다.
그러나 문성민이 코트를 밟은 후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레오의 퀵오픈으로 한 점 따라붙었고, 뒤이어 정한용의 퀵오픈을 문성민이 뛰어올라 셧아웃시켜버렸다. 정태준이 속공을 견제하다 뒤늦게 따라붙어 블로킹 어시스트가 기록되긴 했지만, 사실상 문성민의 ‘원맨 블로킹’이나 다름없는 짜릿한 가로막기였다.
39세 노장에게 블로킹을 당해서 멘탈이 흘렸을까. 정한용의 그 다음 퀵오픈은 아웃됐고, 정한용의 그 다음 오픈 공격을 받아올려 레오의 퀵오픈이 성공하면서 21-21 동점이 됐다.
동점을 만든 뒤에도 현대캐피탈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막심의 후위공격 아웃과 허수봉의 파이프(중앙후위공격)으로 23-21, 연속 7득점을 성공시켰다. 연속 7점을 내준 대한항공은 막심의 백어택과 정한용이 레오의 퀵오픈을 가로막으며 23-23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레오의 퀵오픈으로 24-23 매치포인트에 도달한 현대캐피탈은 막심의 백어택을 세터 이준협이 가로막아내면서 2시간 4분에 걸친 명승부를 세트 스코어 3-1(25-22 25-19 22-25 25-23)으로 끝냈다. 이날 승리로 승점 3을 챙긴 현대캐피탈은 승점 26(9승2패)으로 대한항공(승점 25, 8승4패)을 제치고 선두로 도약했다. 대한항공보다 아직 1경기를 덜 치렀음을 감안하면 6일 KB손해보험전 결과에 따라 격차를 더 벌릴 수 있다.
이날 문성민이 기록한 득점은 딱 1개. 전성기 시절엔 1경기에도 37점을 올리곤 했던 문성민이 2024~2025시즌 들어 11번째 경기만에 올린 시즌 첫 득점이었다. 그러나 이 득점 한 개로 현대캐피탈은 승부를 5세트로 끌고가지 않고 4세트에 끝내면서 승점 3을 오롯이 챙길 수 있었다.
문성민에게 토종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은 허수봉도 큰 형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을 찾은 허수봉은 “여전히 에이스다. 코트에 서 계신 것만으로도 팀원들에게 큰 힘을 주신다. 분위기를 바꿔주시려고 파이팅도 더 해주신다. 블로킹 득점 1개 덕분에 분위기가 더 타올랐다”고 치켜세웠다.
예전 전성기 땐 승리 때마다 수훈선수 인터뷰를 했던 문성민이지만, 경기 뒤 코트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자 어색해했다. 문성민은 “저도 그 블로킹 득점이 올 시즌 첫 득점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식하고 있었다”라면서 “교체 투입될 때 분위기가 상대쪽으로 넘어갔고, 신펑이 처진 게 보였다. 그 상황에 코트에 제가 들어갈 것 같았다. 5세트를 준비하는 과정이구나 생각했다”라고 투입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 24-23 매치포인트에서 서브를 때린 것은 문성민이었다. 문성민은 과거 올스타전 서브킹 컨테스트 3회 우승자이자 2016~2017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시속 123km의 서브는 지금도 역대 최고 신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런 그였기에 강서브 에이스로 경기를 끝내는 그림도 기대케했다. 그러나 문성민은 안전하게 맞춰때렸다. 문성민은 “막상 경기 마친 뒤에는 좀 더 강하게 (서브를) 넣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10년 전이라면 그렇겠죠(웃음).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어떻하면 범실하지 않고 흐름을 유지하고 이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우선이었죠”라고 설명했다.
이제는 교체 멤버가 된 문성민. 이 한 마디로 백업 선수들의 힘겨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교체 투입,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건 맞죠(웃음). 그 한 번의 플레이로 평가를 받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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