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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의논’한 세종, 소통의 모범

입력 : 2009-12-30 20:58:29 수정 : 2009-12-30 20: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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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89호 특집 ‘불통시대에 돌아본 소통의 리더십’
◇세종
정치행위를 가리키는 말처럼 표현이 많은 말도 드물다. 정치를 듣고(聽政), 정치를 하고(爲政), 정치를 베풀고(施政), 정무를 본다(視事) 등은 정치행위를 뜻한다. 이들 표현 중 청정(聽政)과 가장 어울리는 우리 역사의 인물로는 단연 세종이 꼽힌다. 왕위에 오른 뒤 세종이 제일 먼저 내놓은 일성은 ‘의논’이었다. 이후에도 세종은 신하들에게 진언과 직언을 요구했다. “시행할 만한 조건을 가려 뽑아 알리게” 하는 등 건의사항을 지체 없이 시행하도록 했다. 그래서인지 ‘더불어 의논한다(與議)’는 세종실록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표현 중 하나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세종 시절이 한국 역사상 ‘듣는 정치’가 가장 모범적으로 시행된 때였다”고 강조했다. 역사비평 89호가 다룬 특집 ‘불통시대에 돌아본 소통의 리더십’의 기고문 ‘세종대의 정치적 의사소통과 그 기제’에서다.

김 교수는 “세종은 국가의 문제를 널리 물었고 말을 잘 받아들였다”며 “이렇게 결집한 지혜와 대책을 심사숙고해서 국정에 반영했다”고 평가한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의 정치문화가 성숙하게 됐다는 게 김 교수의 평가다. 폭넓은 공론 형성과 협력적 파트너십의 정치가 중심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을 평가할 다른 덕목은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의사소통이 제약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왕권에 위협적인 요인을 제거한 태종이 ‘힘의 정치’를 보였다면, 세종이 소통 정치를 가동하면서 ‘정치의 힘’을 발현했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
계간지인 역사비평은 세종과 함께 정조·이순신·조광조·율곡 이이를 통해 우리 역사의 소통 역사를 담고 있다. 국왕 중에서 세종과 더불어 소통의 모범을 보였던 군주가 정조였다. 정조는 왕도정치 실현의 주체는 신하가 아닌 군주라고 자부했다. 지역간 차별을 없애려는 일시경외(一視京外·서울과 지방의 인재를 똑같이 등용), 계층 간 차별을 없애려는 손상익하(損上益下·상위계층에서 덜어다가 하위계층에게 보태줌)를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가 백성과 소통을 통해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했다”고 평가했다.

이순신도 조선시대 소통의 문화에서 성공적인 지도력을 보여줬던 장수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고,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부 교수는 “단순한 지시를 벗어나 하급군사들까지 적극적 소통에 참
◇이순신
여시키려 했다”며 “이순신은 소통과 리더십 면모에서 한국적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세종과 정조, 이순신이 소통의 리더십에서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면 조광조와 이이는 소통의 노력을 펼치면서 좌절을 경험했다. 이는 역사비평의 연구위원인 김성보 연세대 교수의 종합적인 견해다. 중앙정계에 등장했다가 기묘사화로 4년 만에 숙청된 조광조는 국왕과 소통에는 성공했으나, 그를 옥죄는 당파성과 급진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붕당을 없애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이는 언론을 통한 소통의 기제는 확보했지만, 이를 정치관행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한국 현대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사는 1948년 초대 정부가 수립된 이래 어느 정권도 의사소통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소통 측면에서 조선 정치문화를 조망하는 게 의미 깊은 이유다. 하지만 조선시대 소통의 정치가 언제나 이상적으로 구현됐던 것은 아니라는 게 필자들의 생각이다. 소통의 문제는 성리학적 소통론과 명분론, 대간의 독립권과 언론 독점의 폐단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균형이 중요했다는 게 이들 학자의 분석이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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