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꽃을 피우려 흘린 ‘눈물’ 시간이 흘러도 잊어선 안돼”

입력 : 2010-05-21 17:36:23 수정 : 2010-05-21 17:36:23

인쇄 메일 url 공유 - +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낸 소설가 윤후명씨
소설가 윤후명(64)은 소설 이전에 시로 먼저 데뷔했을 정도로 미학적인 문장과 사유로 호가 난 작가다. 그의 대표작 ‘협궤열차’ 연작이 보여주는 쓸쓸하고 도저한 허무의 세계는 후배 작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발표하지 않은 지는 꽤 오래 되어 그의 깊은 문장과, 서해 갯벌을 지나가는 바람소리 같은 쓸쓸함이 그리운 독자들로서는 아쉬운 세월이 길었다. 그런데 그가 소설이 아닌 산문집을 들고 나와 갈증을 적셔준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중앙books)라는, 제목부터 길고 시적이다. 소설보다 더 맛깔 나는 문장들이 지천이고, 이것저것 재지 않는 직설적인 ‘산문’이라는 장르여서 그의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기에 좋다.

‘장다리꽃밭 풍경’에서 고백하는 양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를 키워준 아버지가 ‘양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그는 이 산문집에서 처음으로 발설했다. “그가 처음 우리 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육이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강원도 강릉의 읍사무소 앞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젊은 법무장교였고, 어머니는 그 앞 신작로 맞은 편에서 담배장사를 하고 있던 청상(靑孀)이었다.”(43쪽) 그는 아버지를 ‘그’라고 시종 표현하고 있는데 그의 양아버지 ‘그’는 그에게 법학을 공부할 것을 종용했지만 끝내 그 길을 가지 않고 문학 쪽으로 와버렸다. 하지만 그는 다짐한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글을 쓴다. 그가 원한 길을 가지 않았으니, 그것보다 한층 더한 결의로 나를 다지면 그의 뜻을 포괄하는 역설의 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45쪽)

그의 소설에 주조음으로 흐르는 도저한 허무의식이 생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조건이 부여한 어떤 지점에서 싹트고 있는 건 아니지 물었더니 윤후명씨는 “아무래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하나는 무형의 아버지요, 또 하나는 직접 보고 자란 분인데, 그 분을 정말 존경하지만, 두 분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제 문학이 떠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윤후명씨. 그는 “꽃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삶의 원초적 물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려움이기도 하다”면서 “그래서 사랑인 것”이라고 산문집 서문에 적었다.
‘오래 지켜보기’라는 꼭지도 일품이다. 초정 김상옥 선생의 말을 전하는 이 산문에서 그는 진짜와 가짜 도자기를 구분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그 방법이란 간단하다. 그냥 오래 지켜보는 것.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결국 싫증이 나는 것과 싫증이 안 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싫증이 나는 것은 가짜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존구자명(存久自明)’, 오래 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말이다. 진짜 사랑도 그와 같으니, 오래오래 지켜볼 일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소설가 윤후명씨는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문학의 길을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가 이번 산문집에 채용한 독특하고 길고 인상적인 제목은 그의 자작시에서 비롯됐다.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 꼴뚜기젓 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희망’)

그는 서문에 “지난 시간이 흘린 많은 눈물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그 눈물이 말라가면 남긴 얼룩이 내 삶의 무늬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꽃과 눈물 사이에 이 책을 바치며 나를 글의 제단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고 썼다.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고 믿는 윤후명씨.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전화를 받고 “문학은 도구가 아니고 목적이며 문학이란 삶 그 자체”라고 먼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츄 '상큼 하트'
  • 츄 '상큼 하트'
  • 강지영 '우아한 미소'
  • 이나영 ‘수줍은 볼하트’
  • 조이현 '청순 매력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