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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휴가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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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30 23:22:31 수정 : 2019-03-22 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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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하는 대로… 갈수록 정형화 / 욕망 충족 요구의 소비도 발목 / 쉬고자 하는 선택지·시기 존중 /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 찾아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광고 카피다. 광고가 시작되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홀로 지붕이 열린 스포츠카를 운전하며 등장한다. 멋진 풍광의 해변도로를 따라 신나게 어디론가 떠나는 주인공 여성의 왼쪽 손에 신용카드가 들려 있었던 광고 장면이 떠오른다. 광고 스토리는 열심히 일한 후에 꿀맛 같은 휴가를 떠나는 직장인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표상하지만, 실상 광고 카피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는 신용카드 쓰러 떠나라는 것이었던 셈이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동네 마트에 가니 8월 2일부터 5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단골로 가는 비빔밤 집에도 휴가 일정을 안내하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너도나도 휴가를 떠나는 요즈음 사무실 지켜봐야 능률도 오르지 않고 마음은 어느새 콩밭에 가 있는 경우가 다반사일 듯하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실제로 현대인의 삶에서 휴가나 여가가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일군의 사회심리학자들이 일상 속에서 만족감 혹은 행복감을 느끼는 영역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가족, 친구관계, 건강 등이 높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대와 달리 경제적 풍요로움, 여가, 일(직업)의 순으로 만족도 점수가 높게 나타났다.

 

그런 만큼 점차 정형화돼 가고 있는 휴가 방식이나 여가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은 휴가 시기이다. 너도나도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떠나느라 전국의 이름난 해수욕장과 계곡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성수기 바가지 요금에 쓰레기 더미로 몸살을 앓게 됨은 재고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이 수수께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후배 덕분에 조금은 풀렸다. 후배와 여름휴가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왜 너나없이 여름에 휴가를 가느라 야단법석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니, 후배 왈 출판업계만 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함께 휴가를 떠나는 관행이 자리 잡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인쇄소가 휴가를 떠나면 출판사도 함께 쉬어 줘야 일이 능률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휴가 시기를 현장 상황을 고려하되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는 방안이 도입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식 휴가철보다 비수기 여행을 즐기는 편인데 비용 부담도 적고 무엇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어 금상첨화다. 사람이 북적이고 도로에 자동차가 꼬리를 물어야 휴가 기분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쉬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지도 존중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용카드 ‘긁으러’ 떠나라는 광고의 유혹이 아니어도 휴가가 소비 일변도로 흐르고 있음도 유감이다. 휴가가 끝난 후 신용카드 빚을 갚느라 전전긍긍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년 내내 여름휴가를 위해 돈을 모은 다음 아낌없이 쓰고 다시 내년을 기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해외 여행지에서 한국인이 소비하는 신용카드 규모가 매년 폭증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고 더불어 충족할 것을 요구하는 소비에 발목 잡히기보다 진정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줄 ‘나만의’ 휴가 양식을 만들어봄은 어떨지 싶다. 최근 세대별 근로의식을 주제로 한 조사에서, ‘일 가족 나 자신’ 가운데 중요한 순서를 정하라는 질문에 기성세대는 일-가족- 나 자신의 순이라 답을 했고, 신세대는 가족-일-나 자신의 순이라 답을 했다. 세대를 불문하고 나 자신에 대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고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렇다면 휴가야말로 평소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아가 자신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시간으로 채워보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자꾸 멀리하게 되는 책과 모처럼 친해지는 시간 마련하기, 분주하고 번잡한 생활 덕분에 놓쳐 버린 영화 보기, 추억과 기억을 더듬으며 가족 사진 정리하기 등 긴 목록이 이어질 법도 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여름 휴가의 추억이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할머니댁을 찾아가 콩밭의 김도 매고, 밭에서 갓 딴 옥수수도 쪄먹고, 부추 잘라서 전도 부쳐 먹으며, 밤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누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었다. 할머니댁에서 느꼈던 사람 사는 냄새, 천천히 흐르는 시간, 맛있는 공기 덕분에 충분한 쉼의 의미를 만끽했던 기억이 새롭다.

 

휴가와 소비가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휴가에도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도 우려가 된다. 일을 떠난 은퇴자나 일의 기회를 갖지 못한 실업자에게 소비 일변도의 여가나 휴가는 깊은 좌절과 예기치 않은 소외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독일 유학시절 자녀가 셋 이상이면 주민센터와 같은 곳에서 가족을 위한 여름 휴가비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어 즐거운 휴가를 보냈노라는 선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남들 하는 대로’의 휴가 대신 나만의 의미와 타인을 향한 배려가 담긴 휴가가 우리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정착되길 기대해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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