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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행동 야만·포학 그 자체… 시위대 땅에 묻고 어린아이 300명 살해” [3·1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신년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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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01 14:00:00 수정 : 2019-01-07 17: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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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탄압 생생한 증언들 “일본의 신문과 문장들은 하나같이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자 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인이 한국에서 하는 행동을 야만·폭학이란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1919년 5월19일 중국 공민공보의 보도는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을 압축하고 있다. 일제는 은폐, 왜곡에 혈안이 되었으나 무자비한 탄압의 실상은 각국 언론과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을 통해 국제사회에 전해졌다. 
3·1운동에 대해 일제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대응했고 참가자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당시 선교사들이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들을 모아 발간된 ‘더 코리안 시추에이션’(The Korean Situation)을 보면 선교사들의 참혹한 방식의 시위 진압에 대해 경악하고 있었다. 10세 안팎의 어린아이들조차 독립을 외쳤다는 이유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을 받았으며… 7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 300여명이 이미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는 증언도 전해졌다.

4월4일 일본 도쿄발 로이터통신은 “3월29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40명의 시위대가 일본 경찰과 소방대의 갈고리에 찍혀 질질 끌려가서 역전에서 선 채로 하반신이 땅에 묻혔다”고 참혹한 상황을 전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는 또 다른 참극의 현장이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한 제암리 주민들이 저항을 이어가자 4월15일 일본군은 마을을 완전히 포위한 뒤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하고 총질을 했다.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당시의 참상을 전한 AP통신 특파원의 보도는 이렇다.

“무섭게 타서 뒤틀린 한 시체가 교회 구내 누워 있음을 보았으며… 언덕 위에는 자그마한 거적으로 덮인 시체 더미가 널려 있었고 주변에는 그의 가여운 유족들이 몇 사람 둘러서 있었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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