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부인,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와 함께 사는 평범한 남성이다. 그는 지난 2016년 10월 어느 날 평소 아이가 자주 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놀이터에서 우연히 휴대전화 1개와 신용카드 1매를 발견해 이를 주웠다.
A씨는 해당 신용카드 주인이 양모(여)씨임을 확인하고 이를 돌려주려 했다. 신용카드 고객센터에 직접 전화해 카드 번호를 알리며 분실 신고를 하고, 상담원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문의도 했다. 상담원은 “신용카드 주인과 직접 만나 전달하는 것보다 경찰서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A씨 본인이 워낙 바쁘다 보니 경찰서에 찾아가 분실물을 맡기는 일이 차일피일 지연됐다. 우선 그는 당시 강남의 한 통닭집에서 주방보조로 일했는데 주로 야간에 투입돼 새벽 2∼4시까지 근무하는 게 보통이었다.
2017년 1월에는 부인이 전십자인대 파열 등으로 수술을 해 12주일 동안 A씨가 간병을 도맡았다. 같은 해 3월에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 보니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는 그냥 가방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어버렸고 7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결국 2017년 5월 경찰 수사망에 A씨가 포착됐다. A씨 가방에서 남의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찾아낸 경찰은 점유이탈물횡령 혐의로 그를 입건한 뒤 “왜 임자에게 돌려주지 않았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헌법재판관 시절의 이공현 변호사. 그는 놀이터에서 주운 남의 물건을 7개월간 보관했다가 절도범으로 몰린 남성의 국선대리인을 맡아 헌법재판소에서 승소 결정을 이끌어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A씨는 “해당 물품을 경찰서에 전달하려고 가방에 넣고 다니다 잊고 있었을 뿐 내가 가지려는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수술을 한 아내 간병,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 뒷바라지 등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습득한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어 번호를 알아내 원래 주인과 통화하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얘기도 했다.
여러 정황을 살핀 경찰은 A씨가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훔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해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은 A씨가 남의 물건을 7개월 동안이나 자신의 가방에 보관한 것은 가지려는 의사가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2017년 8월 무혐의 대신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기소유예란 범죄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피의자의 기존 전과나 피해자의 피해 정도, 피해자와의 합의 내용, 반성 정도 등을 검사가 판단해 재판에 넘기지 않는 처분을 뜻한다.
A씨는 몹시 억울했다. 반드시 무혐의 처분을 받아내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고 믿은 그는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고 무혐의 처분을 받게 해달라”며 2017년 9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관(2005∼2011년)을 지낸 이공현 변호사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A씨를 위해 국선대리인으로 나섰다.
◆헌재 "불법취득 의사 없어… 검찰이 틀렸다"
헌재는 최근 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A씨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할 것을 결정했다고 23일 밝혔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점유이탈물횡령죄가 성립하려면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취득해 영리를 추구하려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며 “A씨가 습득한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약 7개월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맞으나, 출퇴근 시 이용하는 가방에 해당 물품을 넣고 다녔다는 점에서 A씨 주장대로 출근길에 경찰서에 분실물을 전달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A씨는 지난 7개월 동안 야간근로, 배우자 간병, 가사 및 육아로 인해 정신이 없어 해당 물품의 전달을 잊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습득한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달리 사용하거나 처분하려고 한 사실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헌재는 “A씨 주장의 진위를 더 엄밀하게 검증하지 않고 불법 취득의 의사가 인정된다고 판단한 검찰 결정은 점유이탈물횡령죄의 법리를 오해했거나 수사가 미진한 상태에서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며 “A씨의 형사책임을 인정한 기소유예 처분은 법리 오해 내지 수사 미진의 잘못이 있는 자의적 검찰권 행사”라고 꼬집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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