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기점으로 사회 곳곳에서 구조적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들 한다. 여기에는 관성처럼 굳어 있던 낡은 사회·문화적 잔재가 비로소 새 시대에 걸맞게 탈바꿈할 것이란 기대감이 포함된다. “맞는 말인 건 알겠는데 아직 관행이…”라며 얼버무렸던 것들을 더 이상 피할 길 없이 수행하도록 사회가 진일보하리라는 희망이다.
정부와 기업이 서로 떠밀듯 미뤄온 ‘병가휴가(유급)’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기업 사정을 고려해 자율권을 주는 아량을 베풀었고, 기업은 정부가 강제하지 않은 것을 굳이 보장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암묵적 합의 아래 대다수 노동자들은 ‘아프면 쉰다’는 상식(?)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반문하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가장 현실화 힘든 수칙을 제일 앞세웠던 정부
지난달 12∼26일 보건복지부가 844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정부의 코로나19 생활방역 행동수칙 초안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원칙으로 ‘아프면 3∼4일 집에서 쉽니다’(28.6%)가 꼽혔다. 이에 대해 응답자들은 휴가 보장은 물론 쉬었을 때 개인에게 미칠 불이익을 차단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아프면 쉰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지침 첫머리에 넣은 것이 적절하냐는 일각의 우려가 무색하게, 직장인들이 토로한 현실은 “아파도 못 쉰다”는 것이라니. 정부와 현장의 현실 감각 차이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두루뭉술하게 쉬라고만 표현한 것에 대해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1차 최종안에서 생활방역 수칙의 상징과 같았던 ‘아프면 쉽니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뒤 이어 아프면 며칠간 집에 머물 수 있도록 법제화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쉬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유급병가(paid sick leave) 여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378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급으로 쉬어야 한다면 쉬기 힘들다’고 한 이가 55.1%에 달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상 병가는 회사에서 유급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다. 무급병가조차 대부분 회사는 개인 연차에서 먼저 차감한 뒤에야 처리하는 실정이다. 사실상 유급병가는 꿈꾸기도 힘들고, 무급병가도 연차 소진을 다 해야만 쓸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더욱 적나라한 현실은 이 연차휴가조차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43.4%로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아파서 쉬겠다 했더니 영영 쉬라고 했다’는 반응도 그리 낯설지 않다.)
◆“아픈데 왜 연차를 쓰죠?” 여전히 ‘병가’는 먼 이야기
휴가(vacation)와 병가(sick leave)의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휴가는 언제 쉬겠다고 미리 계획하는 것이지만 병가는 갑자기 아플 때 쓰는 것이다. 서구에는 이 개념이 정착해 있다. 몸이 안 좋으면 휴가를 가는 게 아니라 병가를 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스웨덴의 경우 노동자에게 보장되는 병가 일수를 제한하지도 않고, 급여도 통상임금의 77.6%를 지급한다. 병가가 너무 길어질 경우에만 따로 근무시간 조정이나 장기휴직 등으로 협상을 한다. 미국은 한국처럼 유급병가 보장법이 없긴 하지만,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사기업 노동자 73%가 유급병가를 쓸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63% 수준이었던 유급병가 도입률이 매년 차근차근 상승한 결과다.
미국 사례를 보면 법이 없다고 기업이 유급병가를 도입하지 않는 건 아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결국 모두가 윈윈하는 방향이라고 보았기에 그 길을 간 것이다. 법제화도 필요하지만 기업의 노동 환경·문화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노동자 입장에서 ‘정부는 멀고 사장은 가깝다’. 정부가 아무리 강력하게 독려한다 해도 직장인이 당장 눈치봐야 하는 건 회사다. 여전히 경직된 조직문화에서는 정부가 내린 행동 수칙이라 해도 무력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이런 노동 환경 개선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지구촌을 덮친 무시무시한 이 감염병은 역설적으로 ‘아프면 쉬는게 모두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사회가 체감하도록 했다. 아파도 참고 나오려고 하는 직장인이 많을수록 각종 질병 전염의 리스크를 우리 모두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프면 쉰다는 단순한 명제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일부 국가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물론 이번 코로나19 때는 마스크를 열심히 쓴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보다 방어를 잘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아파도 쉬기 힘든’ 한국인들이 마스크를 더욱 필사적으로 챙겨야 했던 측면이 없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선방했던 ‘K방역’이 정작 생활 방역에서 뚫린다면 세계가 주목한 감염병 대처 성과조차 빛바랠지 모른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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