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2019년 낙태 처벌 헌법불합치 결정
국회에 2020년 말까지 개선 입법 주문
여성계 “전면 폐지”… 종교계선 “반대”
정치권 “표심 잃을라” 소극적인 태도
개정안 핵심은 ‘처벌조항 삭제’ 여부
정부·국민의힘, 제한적 임신중절 허용
민주·정의당은 ‘폐지’… 절충점 못찾아
입장차 커 연내 최종안 마련 어려울 듯
‘누가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형법상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한 보완 입법을 놓고 눈치를 보는 여야 정치권의 분위기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관련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지만 여야 정치권은 낙태죄 처벌 폐지에 반대하는 종교계와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계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양쪽 모두 무시할 수 없는 표심으로 작용해 선뜻 당의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보완 입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보완 입법 시효는 오는 31일까지다. 법무부가 지난 10월 정부안을 내고 몇몇 국회의원도 낙태죄 폐지와 관련된 형법·모자보건법을 발의했지만, 법안별로 낙태죄 전면 폐지를 둘러싼 입장차는 매우 큰 상황이다. 관련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연내 최종안 마련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낙태죄 전면 폐지, 쟁점은 처벌조항 삭제 여부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자체가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과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다. 단순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인 만큼 국회가 후속 입법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따라 낙태죄 처벌조항이 사라질 수도, 일부 남을 수도 있다.
2019년 헌재는 낙태 시술 처벌 규정이 담긴 형법 제270조 1항(의료인의 낙태 시술 시 2년 이하 징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회에 2020년 12월31일까지 개선 입법을 주문했다. 단순 위헌 결정을 내리면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되는 법적 공백 사태를 야기할 수 있어서다.
정치권의 핵심 쟁점은 낙태죄 전면 폐지 여부로 모아지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낙태죄 전면 폐지에 반대한다. 처벌조항도 살려두자는 입장이다. 반면 민주당과 정의당은 낙태죄 전면 폐지와 처벌조항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형법에 처벌 규정을 두고, 모자보건법에서 유전학적·전염성 질환이 있거나 강간·준강간을 당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 간에 임신한 경우, 임신 상태가 여성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을 때 등 예외규정을 뒀다.
정부는 모자보건법에 있는 예외규정을 확대해 형법에 규정하자는 입장이다. 임신 14주 이내 낙태는 처벌하지 않고, 강간 등 범죄행위로 임신한 경우 등에 한해 24주까지 수술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안은 이보다 엄격한 제한을 뒀다. 원칙적으로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기 이전인 6주 이내만 낙태수술이 가능하고, 상황에 따라 20주까지만 허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박주민·권인숙 의원과 정의당 이은주 의원은 임신주수를 합법·불법을 가르는 기준을 삼아서는 안 된다며 전면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대체로 임신 중단에 대한 지원체계를 담고 있어 상대적으로 의견차가 적다.
정부안과 국민의힘안은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낙태 시술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국민의힘 조 의원은 모든 병원이 아니라 일부 병원에서만 낙태수술이 가능하도록 했다.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신청한 병원에 한해 가능한 기관을 지정·공개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안은 사회적 지원체계를 보다 폭넓게 담았다. 권인숙 의원은 임신·출산 및 인공임신중단 센터를 설치하고 임신부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정부가 의료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이은주 의원은 임신부의 장애 유형이나 나이, 언어, 소득 수준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각종 지원을 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임신부 동의 없이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與도 뒷전… 입법 공백 불가피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은 절충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처벌조항에 대한 입장차가 극명해서 사실상 어느 한쪽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각당 관계자들은 결국 입법 주도권을 지닌 여당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인화성이 강한 낙태죄 보완 입법 추진에 소극적이다. 오는 31일까지 입법 보완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부터는 형법의 처벌 효력이 사라진다. 모든 낙태수술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된다. 다만 그동안 형법 낙태죄 처벌조항이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만큼 입법 공백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2018년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답한 여성 1만명 중 인공임신중절을 경험한 여성은 756명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2017년 한 해 동안 이뤄진 낙태 건수를 약 5만건으로 추정했다. 지금까지 법망을 피해서 암암리에 적지 않은 낙태 수술이 이뤄진 만큼 당장 처벌 규정이 없어도 큰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은 작다.
헌재의 판단은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의료행위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건강권을 보장하는 측면도 있다. 낙태가 불법인 시대에는 임신 중단에 대한 사회적 지원체계가 전무했지만, 이제는 인공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정부 가이드라인과 상담·심리 지원, 건강보험 적용, 자연유산 유도약물(먹는 낙태약) 도입 등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낙태죄 문제는 당 차원에서 나서기보다는 해당 상임위를 중심으로 계속 논의할 계획”이라며 “낙태죄 전면 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논의가 진척되지 않으면 해당 쟁점과 관계없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의료 지원 등이 먼저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낙태죄 완전 폐지” vs “임신주수 제한” 이견
‘낙태죄 전면 폐지 vs. 임신주수 제한’
현재 낙태죄 존치 논쟁의 핵심 쟁점이다. 지난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개최한 낙태죄 관련 공청회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임신주수는 형사처벌 기준으로 삼기에는 명확성이 너무 떨어진다. 오로지 추정되는 숫자이며 의료서비스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라며 “의사는 자신이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판단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에 의사의 거부권과 상담의무, 강제 대기기간 등이 결합되면 실제 수술 가능 기간은 법률상 임신주수 기준보다 훨씬 줄어들게 된다.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기 전의) 캐나다에서도 첫 진료부터 수술까지 평균 8주나 소요된다고 보고됐다”고 덧붙였다. 김 부연구위원은 “캐나다에서는 주수 제한이 없어도 대부분 초기에 수술한다. 20주 이후는 1% 미만이고 그나마도 거의 24주 이내에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감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교수(기독교윤리)는 “낙태법 (전면) 폐지에 반대하는 전통적 입장은 임신중지를 태아의 생명권을 빼앗는 여성의 이기적인 자기결정권이라고 비난하는데, 이는 임신 원인과 임신중단의 상황에 남성 파트너의 마땅한 책임을 교묘하게 은폐하려 했던 불순한 의도와 직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연취현 변호사는 “태아는 5주 3일이면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10주가 지나가면 아기는 신경계가 형성되고 꿈을 꾼다. 10주가 지나면 아기가 생각을 하고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라며 “통상 10주를 기준으로 낙태수술 방법도 흡입술에서 절단 후 추출하는 방법으로 바뀌게 된다”고 맞섰다. 이어 “임신 초기에는 성장발달이 일정하기 때문에 산모가 정확한 임신일자를 모르더라도 태아 크기 등에 기반한 주수 판별이 거의 정확하다는 게 산부인과 선생님들 다수의 의견”이라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주 이내에 낙태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으로서의 존엄을 해하지 않는 낙태 허용범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필량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은 “보통 임신 초기에는 약물을 이용해 임신중절을 하는데, 임신 9주가 넘어가면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절 방법은 실패율이 증가해 자궁소파술을 주로 시행하게 된다”며 “이 경우 임신 초기에 비해 다량의 출혈과 자궁 파열, 복강 내 장기의 손상·감염 등과 같은 단기 합병증 위험이 급격히 증가하고 수술 시간이 길어져 자궁 내 감염, 유착 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의학적 검토를 근거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임신한 여성이 아무런 제한 없이 낙태할 수 있는 최대 허용 임신주수를 임신 10주(70일) 이내로 제한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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