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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충주 고구려비와 단양 신라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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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0-07 22:40:39 수정 : 2022-10-07 22:4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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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적성비

지난주 학과에서 진행하는 추계 학술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 지역은 제천, 단양, 충주, 진천, 괴산, 보은, 옥천 등 충청북도에 있는 주요 역사 유적이었다. 충북은 남한강이 지역을 관통하는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충주고구려비’와 ‘단양 신라적성비’는 당시 역사를 잘 담고 있는 비석이다. 충주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을 기념하고 있는데, 현재 대한민국 영토 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1979년 처음 발견되었으며, 7차에 걸친 조사 끝에 고구려임이 밝혀졌다. 전체 730여 글자 중 200자 정도만 읽을 수 있는데 향후 더 많은 글자의 판독도 기대된다.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고, 신라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르며, 고구려 사령관을 뜻하는 ‘당주’라는 명칭도 보인다. 충주와 인접한 단양에는 6세기 신라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단양 신라적성비가 있다.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의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상징한다. 진흥왕은 5세기 때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상류 지역을 회복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에 이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석은 화강암 자연석으로 1978년 발견 당시 상당 부분이 땅에 묻혀 있어서 비면이 깨끗했다. 비면에 새겨진 430여 글자 중 309자의 해독이 가능하다. 당시 진흥왕의 적성 정복에 공을 세운 고구려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주목된다. ‘야이차’가 그 주인공으로 비석을 세울 무렵 ‘야이차’가 사망하면서, 그 가족들에게 은전을 하사한 기록이 보인다. 적성비 건립을 계기로 진흥왕은 더욱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하였고, 이것은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 4대 순수비(척경비) 건립으로 이어졌다. 고대에 새겨진 비석들은 역사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데 주요한 열쇠가 된다. 충주고구려비와 단양 신라적성비를 통해 현재의 충북 지역과 남한강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했던 삼국의 역사를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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